6.25 동란은 바로 우리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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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동란은 바로 우리의 일이다.
  • 광주데일리뉴스
  • 승인 2013.11.26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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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 : 그때의 할머니, 어머니의 장한 모습)

▲ 정환담 광주국제영화제 이사장 전남대 명예교수
금년은 6.25동란이 일어난지 63년이 되는 해로 휴전 협정이 체결된 지 60년이 되는 해이다.

1945년 8.15 광복 후 민족의 해방을 기대하였던 간절한 소망은 미국과 소련의 국제 정치적 타협의 결과로 남북의 분단으로 정착되다가 1950년 북한의 기습공격으로 6.25 동란이 나는 민족사의 가장 큰 비극이 이 땅에 벌어졌고 아직도 그 비극의 끝은 보이지 않고 있다. 6.25동란 중 한국을 도와서 한국전에 참전한 외국의 참전 용사들이 한국을 방문한다는 기사와 보도 화면을 보았다.

특히, 백발이 성성한 푸에르토리코(서인 제도의 미국 신탁총치 지역(당시), 지금은 자치주이다)의 참전 용사들 모습을 TV에서 보면서 63년전의 6.25 전란의 기억을 다시 살려 보았다.

그들 중에 전사자도 많았을 것이며, 또한 그들의 총에 맞아 죽은 북한의 인민군도 많았을 것이다. 외국의 군대도 우리를 도우려고 왔었는데 우리가 자신을 위하여 어떻게 하여 왔던가를 생각하니, 오늘날 외국의 참전 용사들은 열렬히 환영하면서 그 동안의 전쟁 중의 고통을 겪어온 우리 겨레에 대한 생각은 잊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고통스러운 느낌을 버릴 수가 없다.

6.25를 겪으면서 어려운 고비마다 인내와 지혜로서 큰 비극을 막아내시던 할머니와 어머니의 모습이 생생하게 회상 되어서 이러한 일들이 잊혀지지 않도록 더 세월이 가기전에 우리 사회 각처의 사례나 기억들을 정리하는 것이 극란을 겪으면서 이겨온 우리 민족의 자생력을 표출하는 것이라 생각하여 사실을 기록하고자 한다.

1950년 6월 25일에 38선이 무너지고 5일안에 서울이 함락되고 나서 한달쯤 되는 7월 26일 아침에 광주가 인민군에 점령되었다. 1950년 5.30선거에서 광주에서(광산군 2구) 2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우리 아버지는 정부와 연락이 두절되어 급히 친구집으로 피하셨다가 좌익청년들에게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셨는데 인공 내무국의 요인이 와서 모시고 간 후 소식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 후, 2,3일 만에 한번씩 인공의 간부들이 와서 집안을 수색하고 차례차례 재산을 몰수 해 갔다. 공포속에서 3개월의 인공기간이 지나고 광주에 대한민국이 들어왔다.

후퇴하여 입산을 준비하는 인공세력들은 마지막으로 자기들의 생존을 위한 모험을 하였다. 그 틈에 우리 가족은 광주로 피난을 들어 갔다.

그후 10여일이 지나서 고향(광산군 지산면, 지금의 광주 북구 건국동)도 치안이 회복되어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치안이 회복되고 나니까 우리 마을에 악질 좌익을 소탕하는 특공부대라가 들어와서 마을의 좌익부역자들을 수색하고 체포하였고, 그들을 처형하기 위하여 마을사람들을 집합시켰다.

군용트럭( 스리쿼터) 1대에 타고 온 10명의 건장한 군복차림의 기관소총을 든 무서운 특공대원도 보았다. 그 특공대들은 인공때에 좌익들에게 가족을 잃고 원한이 맺혀있는 무서운 사람들이었다.

우리 동네의 핵심적 좌익부역자인 인민 위원장, 노동당 위원장과 여성 동맹 위원장의 세 사람이 마을 사람들 앞에 붙들려 나와서 줄뺨(서로 돌아가면서 뺨을 때리게 하는 처벌법)을 맞고 있었다. 그리고 특공대장이 마을 사람들에게 물었다. 이들 외에도 악질들을 고발하면 보복해주겠다고 말하였으나 아무도 고발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나서 3사람을 마을 입구의 조산으로 데리고 가서 처단하려고 하였다.

그들을 데리고 가면 그들을 총살하는 것은 뻔하였다. 온 동네사람들은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벌벌 떨고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우리 할머니와 어머니가 앞으로 나와서 조산으로 처형하려고 데려가는 10명의 특공대 앞에서 그들을 막으면서, 할머니는 분명하게 특공대장에게 말하였다.

“ 이 세사람은 우리 동네의 순박하고 무식한 사람이요. 무서운 인민공화국 체재 아래서 누구라도 ‘너 이 책임 맡아라’고 하면 안 맡을 수 없는 상황이었오. 특히, 인민위원장 전동팔은 인공의 좌익간부들이 입산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집을 털러 오면서 가족을 해코지 할 것 같으니 급히 광주로 피난하라고 알려주어 우리 가족을 구해준 사람이요. 특공대 여러분들이 이 불쌍한 사람들을 죽인다면 이제 대한민국에 원한을 품은 사람을 더 생기게 하는 것이요, 또한 우리 자식들과의 원수를 만드는 샘이니, 새로 회복되어 가는 대한민국에서 살생하여 원한 맺는 일은 제발 이 나라의 앞날을 위하여 하지 말아 주시오”하고 이들 세사람을 안고 그들의 처형을 가로 막았다.

아무리 6.25때 가족을 잃고 원한으로 가득찬 특공대일지라도 인공에게 국회의원 아들을 빼앗긴 노부인 우리 할머니와 남편을 빼앗긴 부인인 우리 어머니의 간곡한 호소에 특공대들은 총끝을 내리고 인공의 3간부들의 처형을 포기하고 우리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그냥 군용트럭(스리쿼터)를 타고 떠나 갔다. 공산당 한 사람도 죽이지 못하고 허탈한 모습으로 돌아간 것이다.

극도로 불안, 초조한 눈으로 내 마을사람들의 처형을 보고만 있던 온 마을 사람들은 끝내 인공 부역자 세사람이 모두 풀려나고 특공대의 군용트럭이 부르릉 떠나자마자 모두가 할머니와 어머니를 에워싸고 살아난 세사람을 서로 부둥껴 않으며 감사와 환희를 표현하였다. 죽음의 공포에서 살아나온 인민위원장등의 세사람의 마음이야, 그리고 그 가족들의 마음이야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 순간에 온 마을 사람들의 마음은 하나가 되었다. 그 후로 우리 마을은 설날이면 온 마을 사람들이 우리 할머니를 비롯하여 어른이 계신 곳에는 한 곳도 빠짐없이 세배를 다녔고 마을을 사랑하고 서로 아끼는 마음을 심었다.

국난의 위기 속에서 서로의 어려움을 도우면서 극복하여 온 일이 어찌 우리 마을 뿐이었겠는가!
어려움에 몸을 던진 분이 어찌 우리 할머니 , 어머니 뿐이었겟는가!

우리 사회가 해방 전국에서부터 여순반란 사건과 6.25국란을 거치면서 그 후로 4.19와 5.18을 겪기 까지 우리 민족이 국난속에서 민족 혼을 살리는 눈물겨운 미담과 인행들이 방방곡곡에 없는 곳이 없을 것이다. 6.25전쟁이 휴진된지 60여년이 가기전에 한가지라도 귀중한 겨레의 혼의 흔적이 사라지기전에 모두 귀중한 마음의 빛이 나는 진주 같은 행적을 찾아서 밝히고 고히 간직하는 운동을 해봄직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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