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의 리더십과 애국정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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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의 리더십과 애국정신(1)
  • 최준원 위원
  • 승인 2015.03.20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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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국제행사 성공시민협의회 시민강사 최준원
요즘 한국과 일본과의 관계는 참 불편하다.

1995년 일본 무라야마 총리는 담화문을 통해 “일본은 과거 한 시기에 잘못된 국가 정책 때문에 전쟁의 길로 나아가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렸고, 침략과 식민지배로 인하여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막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 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합니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최근 아베총리와 그의 수정주의 역사관에 편승한 일본의 우경 세력들은 과거 군국주의의 망령에 사로 잡혀 침략의 역사적 사실을 오히려 합리화하려는 언동을 계속하고 있다.

역사적 범죄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고 반성함으로써 일본이 과거사를 총체적으로 정리하고, 피해 국가들과 화해 하고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으려는 진정성 있는 노력은 하지 않고 과거사에 얽매여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가지 못 하고 이웃나라들과 갈등을 심화시키고 있다.

우리나라가 처한 작금의 현실은 임진왜란 당시와 비슷하다. 우경화를 치닫고 있는 일본과는 군대 위안부 문제와 독도문제 등으로 대립관계에 있고, 남북이 분단되어 있고, 경제는 침체되고, 군대내 집단폭행사건, 무상급식문제, 갖가지 국가정책과 시행방법을 놓고 여야 정치권의 극심한 대립과 국론 분열이 이어지고 있고, 계속 터지는 관 피아들의 대형 부정 비리 사건 사고 등으로, 국민들은 분노와 위기의식을 느끼며 국민의 존경과 신뢰를 받는 강력한 애국적인 지도자를 목마르게 원하고 있다.

이러한 때에, 이순신의 리더십에 대해서 살펴본다.(난중일기 참고)

리더십은 조직의 목표와 구성원의 자질과 처한 상황에 따라서 달라져야 한다. 이순신은 “장수된 자는 나라에 충성을 해아야 하고 그 충성은 반드시 백성을 향해야 한다”고 말했다. 장수란 나를 정확히 알고 우리와 상대편의 강점과 약점을 파악한 연후에 이기기 위한 대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황을 정확히 판단하는 능력과 장졸 간의 소통능력, 결단력이 중요하다.

1. 이순신은 자기직책에 충실한 장수였다.

1591년 2월 전라좌수사로 부임하고 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으니 1년 2개월간 전쟁에 대비할 수 있었다. 그는 명확한 원칙을 세우고 해이해진 군인들의 기강을 바로 잡고 군량미를 비축하고 군인들에게 규칙적인 훈련을 시켰다. 건장한 백성들 가운데서 선별하여 병사들을 충원하고 판옥선과 거북선을 만들고 화포와 화통의 제작과 관리, 사용방법을 연습하고, 무기의 체계적인 준비와 군사훈련을 철저하게 시행했다. 임진왜란이 벌어졌을 때 조선군 장수들 가운데서 제대로 군사훈련을 시킨 장수는 이순신 밖에 없었다.

2. 이순신은 지피지기함으로써 반드시 이길 전투만 했다.

왜구(과거 일본의 해적들)와 일본군은 배를 타고 와서 약탈을 했다. 그들은 조선해군의 배 위로 올라와서 백병전(칼을 가지고 적군과 맞붙어 싸우는 전투)으로 우리 해군을 제압하고 식량과 물건을 빼앗는 전술을 펼쳐왔다. 일본군은 칼과 조총을 가지고 공격을 하니까 조선군이 근접전으로는 이길 수가 없었다. 조선은 오랫동안 왜구의 침탈에 시달려 왔기 때문에 해전이 벌어지면 접근해오는 적선을 물리치는 방어전술을 써왔다.

원거리에서 화포와 각종 화살을 사용하여 적선을 파괴하고 불태워 버리는 전술을 구사했다. 일본 조총의 사정거리는 50-60미터인데, 우리의 화살은 300미터, 화포는 1,000미터 이상 쏠 수가 있었다. 이순신은 화포와 화통으로 공격을 할 때 반동을 충분히 견뎌낼 수 있을 만큼 크고 튼튼한 판옥선과 적군이 배위로 올라올 수 없게하기 위해서 배위에 뚜껑을 만들고 배의 주위에 예리한 창살을 장착한 거북선을 만들었다.

이순신은 전장에서 언제나 맨 앞에서 전쟁을 지휘함으로써 적진 앞에서 두려움에 떠는 부하와 장수들에게는 용기를 불어넣었다.

3. 애국정신이 투철한 장수였으나 무모한 왕명을 거역한 죄로 파직되었다.

이순신은 남의 탓, 환경 탓을 하지 않고 오직 백성을 위해서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서 현지상황을 철저히 분석하고 점검하였다. 1597년 봄. 중국( 명)과 일본 간의 강화 협상이, 일본 측의 우리나라 하삼도 할양 요구 때문에, 결렬되자 일본군은 다시 침공해 왔다. 이것이 정유재란이다.

조정에서는 일본군이 육지에 올라오지 못하도록 부산 앞바다로 나가서 막으라고 명령했다. 이순신이 보기에 그 작전은 병사들과 백성들을 모두 죽이는 무모한 작전명령이었다. 그래서 왕의 명령을 거부했다. 출전을 거부한 이순신은 항명죄로 삼도수군통제사직에서 파직되고 서울로 압송되어 28일 동안 의금부 감옥에 갇혀 갖은 고문과 문초를 당했다.

그러나 여전히 이순신장군이 필요한 시기였다. 그래서 이순신에 대한 구명운동은 힘을 얻었고 이순신은 목숨을 건지고 백의종군하라는 처벌을 받게 되었다.

4. 원균이 후임 통제사로 임명되었다

왕은 원균에게도 이순신에게 지시했던 똑 같은 명령을 내렸다. 현지에 도착하여 전황을 살펴 본 원균도 왕명이 무모한 작전명령이라고 판단하고 이순신처럼 몇 차례 건의했으나 권율장군의 곤장까지 맞고는 왕명에 따라 159년7월 부산 앞바다 칠천량으로 출전했다. 조선의 해군 함대는 칠천량 전투에서 일본수군의 기습작전과 백병전으로 참배를 당했고 이순신이 6년 동안 만들어 놓은 판옥선 150여 척과 거북선 3척이 모두 파괴되고 바다에 침몰되었다.

통제사 원균,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는 전사했고 군사들도 1만 명이상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다. 조선 수군에 남은 판옥선은 전투 도중에 경상도 우수사 배설이 부하 병사들을 이끌고 도망한 12척에 불과했다.

칠천량 전투의 참패 소식을 들은 선조임금은 당황하여 자신이 죽이려 했던 이순신을 또다시 수군통제사로 임명했다. 그리고 이순신에게 수군이 너무 약하니 수군을 폐지시키고 도원수 권율 장군 휘하의 육군에 합류하라고 명령했다. 이순신은 수군을 폐지하면 일본군에 유리하고 조선이 매우 위태롭게 될 것임을 간언하고 왕명을 또 거역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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