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D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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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DNA
  • 광주데일리뉴스
  • 승인 2016.06.14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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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경숙 연합뉴스 논설위원

태국에 근무했던 공공기관 주재원은 그곳에 사는 재미 중 하나로 옷값이 거의 안 든다는 점을 꼽았다. 반소매 셔츠와 반바지 서너 벌로 몇 년을 버틸 수 있다. 사계절 무더운 날씨 때문에 화려하고 비싼 옷은 별 소용 없다. 1년 내내 기후 변화가 없으니 국민 성격도 기복이 없다. 느긋하고 놀라지 않고 웬만한 일에는 그저 마음 좋게 웃는다.

한국 조직폭력배는 태국서 힘자랑, 무기 자랑하지 않는 게 좋다는 우스갯말이 있다. 여유로운 태국인들은 먼저 화를 내거나 상대를 치지 않지만, 정말 분노했을 때는 무기를 들며, 반드시 이를 사용한다. 그래서 상대방이 무기로 위협하면 자신을 향해 사용하겠다는 의도로 파악한다. 한국 영화 속 '조폭'처럼 "너 맛 좀 볼래"라며 흉기를 흔들어대거나 약을 올리면 자신을 해치려는 것으로 간주하고 바로 공격한다. 그래서 태국에서는 싸우지도 않을 거면서 괜히 위협을 위한 위협을 하다간 큰코다치기 쉽다.

이런 데서 볼 수 있는 차이는 기후 등 자연환경에서 비롯되는 부분이 분명 있을 것 같다. 한국인이 성격 급하다거나 기분이 잘 바뀐다는 것은 뚜렷한 사계절 덕분 아닐까. 가마솥더위, 얼어 죽을 수도 있는 혹한 등 3개월 마다 바뀌는 계절로 인해 한국인에겐 변화에 대한 적응력, 임기응변, 순발력이 유전자로 자리 잡은 것 같다.

서울 한복판 전통문화의 거리 인사동을 기점으로 삼청동, 북촌, 서촌, 부암동, 평창동으로 뻗을 조짐을 보이던 일종의 문화 벨트가 몇 년 만에 완연한 모습을 갖췄다. 윤동주문학관, 청운도서관, 서울미술관, 화랑, 개성 있는 음식점과 찻집, 게스트하우스 등이 즐비하게 들어섰다. 곳곳에서 드라마 촬영하는 모습이 눈에 띈다. 서울이 거의 통째로 아파트촌으로 변한 바람에 단독주택들이 남아있는 이런 동네 말고는 '그림 되는' 장소가 별로 없기 때문이라는 게 방송계 인사의 설명이다. 주말이면 연인, 부부, 아이 손을 잡은 부모들이 담벼락에 난, 별것도 아닌 꽃과 나무를 구경하기 위해 골목골목을 찾는다. 사람 냄새가 그리운 데서 온 변화다.

인간사회만 빨리 바뀌는 게 아니다. 그 속의 사람을 닮은 듯 한국은 자연도 시시각각 변화한다. 북악산과 인왕산 사이, 분지와 계곡에 들어앉은 부암동은 계절이 영화 장면 넘어가듯 한다. 도심보다 기온이 2~3도 낮아 강원도 산골 속 같은 겨울이 끝나면 인왕산 둘레길과 북악스카이웨이를 진달래, 개나리, 벚꽃이 흐드러지게 휘감는가 싶은데, 어느새 아카시아가 산을 꽃으로 하얗게 뒤덮고 아찔한 향기로 진동시킨다. 울긋불긋 꽃 대궐이 스러지는 게 안타까워지려고 하면 꽃보다 어여쁘고 파릇한 신록이 천지를 연둣빛으로 물들인다. 5월에는 '꽃보다 신록'이다. 성하의 문턱 6월 북한산 형제봉에서 내려다본 서울은 우람하게 무성해진 숲과 당당한 바위들에 둘러싸여 천 년의 반석 위에 앉은 듯하다. 수십 년 동안 격렬하게 진행된 개발 속에서 북한, 인왕, 북악이 서울의 '허파'로 건재함에 안도한다.

3년 만에 돌아온 서울에서 가장 낯선 변화는 뭐니뭐니해도 광화문 세종로를 오가는 인파의 무표정과 그들 사이에 부는 찬바람이다. 서울은 우울하고 기운 없어 보였다. 저성장과 양극화가 현재를 규정하는 새 기준이 되고, 실업은 젊은이들에게 이 땅을 '지옥'으로 만들고 있었다. 한국 경제는 더는 고도성장이 불가능하단다. 계급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뉘었고, 비정규직이 정규직 되기란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와 같다. 2004년 해외 근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광화문과 시청 앞 광장은 2002년 월드컵이 끝난 지 2년이나 지났지만, 승리의 감격과 열기가 가시지 않은 채 희망과 활력으로 떠돌고 있었다. '다이내믹 코리아'가 10년 만에 딴 나라로 변했다.

부익부 빈익빈, 정규·비정규의 '이중 국민' 구조는 이미 굳어진 걸까. 한국인의 변화 유전자(DNA)에서 답을 찾는다. 우리 국민은 겨울이 가면 봄이 온다는 것을 알고, 봄을 맞기 위해 춥고 긴 겨울을 견디는 것이 체화돼 있다. 역동적일 뿐 아니라 평등의식도 강하다. 사촌이 땅 사면 나도 사야지 가만히 있지는 못한다. 'IMF' 위기 때 시작된 양극화가 더는 악화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빈부, 계층 격차가 손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도 변화를 직감하게 한다. 임금근로자 가운데 비정규직은 3명 중 1명이다. 이 추세라면 비정규가 정규가 될 판이다. 자살률, 노인 빈곤율, 저출산, 이혼 증가율, 노동시간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등 권이다. '묻지 마 범죄'는 분노한 민심의 단면이다. 비정규직, 하도급 근로자들의 자살과 사고로 인한 죽음의 행렬은 이대로는 우리 사회가 지속 가능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변화의 조짐은 이미 보인다. 여야는 4·13 총선에서 경제, 복지 공약을 경쟁적으로 제시했고 선거 결과는 내년 대선을 예측불허로 만들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이었으나 별로 진전되지 못한 경제민주화는 다음 대선에서도 중심 화두가 될 것이다. 양극화 해소, 고용의 질과 환경 개선은 저성장 탈출과 함께 이제 시대정신이 됐기 때문이다. 성장이 먼저냐, 분배가 우선이냐의 소모적 논쟁은 중단돼야 한다. 성장과 분배의 균형을 찾는 것이 과제가 됐다. 우리에겐 70, 80년대 산업화를 위해 흘렸던 피땀, 위기 극복의 '금 모으기' 전설이 있다. 국민은 나라를 위해 움직일 태세가 돼 있다. 문제는 리더십이다. 지도자가 사회를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갈 것인가가 관건이다. 국민의 성원을 업고 '세계의 리더'가 된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 최근 대권 도전을 시사해 한국인과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의 대권 의지가 시대정신을 통찰하고 국민에게 봉사하겠다는 애국심의 발로이지 항간의 소문대로 하늘을 찌르는 욕심 때문이 아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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