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리 없는 사회'와 기본소득
상태바
'일자리 없는 사회'와 기본소득
  • 연합뉴스
  • 승인 2016.06.23 10:3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현경숙 연합뉴스 논설위원

인공지능 알파고(AlphaGo)와 이세돌 9단의 대국이 파란을 일으켰던 즈음 한 원로 철학 교수는 사석에서 "컴퓨터가 인간을 대신하게 되니, 사람은 일 안 하고 얼마나 좋은가"라며 "일을 안 하더라도 일정 생활비를 모두에게 나눠주면 실업 걱정은 안 해도 된다"고 말했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인간이 놀고먹을 수 있는, 말로만 듣던 유토피아의 실현이 눈앞에 온 걸까.

스위스의 '월 300만 원 기본소득' 국민투표를 계기로 전 세계에 기본소득 논쟁이 뜨거워지고 있다. 이달 초 스위스는 성인에게 월 2천500 스위스프랑(한화 300만 원)을 조건 없이 보장하는 기본소득 안을 놓고 국민투표를 했다. 77%가 반대했지만 23%는 찬성했다. 기본소득의 취지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국민이 생계를 위한 노동에서 벗어나 인간적 품위를 유지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었다. 노동하지 않더라도 생계를 위협받지 않는 것이 기본 인권이라는 개념이 깔렸다. 동서고금을 통해 진리처럼 여겨졌던 '인간이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일해야 한다'는 사고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기본소득이 경제적 안정을 보장하면 직업 선택 폭이 넓어지고, 근로자 권리도 강해질 것으로 기대된다.

두 번째 취지는 불평등과 빈부 격차의 해결이다. 세계화, 자동화, 정보통신 기술 발달로 한국뿐 아니라 선진국에서도 고용 없는 성장으로 실업이 악화하고 있다. 사회의 총생산과 기업들의 부가 증가해도 고용된 일부를 제외한 개인들은 실업자나 저임 노동자로 전락하기 때문에 기본소득을 도입해 빈곤을 완화하자는 것이다.

기본소득은 재산 유무, 노동 여부와 상관없이 정부가 모든 국민에게 개별적으로 무조건 지급한다는 것이 원 개념이다. 핀란드는 무작위로 뽑은 표본집단 1만 명에게 월 550유로(약 73만 원)를 지급하는 2년 기간의 실험 프로그램을 도입할 예정이다. 성공적으로 평가되면 국가 정책으로 전환한다. 이는 역설적으로 실업률을 낮추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실업 급여를 받기 위해 저임금 임시직을 꺼리는 실업자들이 기본소득을 얻게 되면 이런 일자리도 맡을 것이라는 가정이다.

네덜란드에서는 중부 대도시 위트레흐트를 중심으로 비슷한 시범 프로젝트가 실험되고 있다. 영국 야당인 노동당은 선거 공약에 포함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기본소득을 구상 중이다. 영국 시민단체 콤파스(Compass)는 '완전한 기본소득'보다는 기존 복지 체계를 유지·보완하면서 일정 금액을 국민에게 지급하는 '복합적 기본소득'을 제시했다. 매주 연령에 따라 8만~10만 원을 지급하는 안이다. 이를 도입하면 아동 빈곤이 45% 감소하는 등 소득 불평등을 개선할 것으로 예상했다. 이를 위해서는 80억 파운드(13조7천억 원)가 필요하다. 나미비아, 브라질, 미국의 알래스카에서는 부분적으로 기본소득을 보장하는 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몇몇 교수들, 사회시민단체 등이 기본소득에 대해 연구하고 있으며, 소규모 정당들이 최근 실시된 총선, 대선에서 공약으로 내걸었다. 시민단체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와 문화연대, 노동당 등은 20대 총선 직전인 지난 3월 "노년 빈곤이 심화하고 청년 실업자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국회가 기본소득 정책을 진지하게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남시가 시행 중인 '청년배당'은 일종의 기본소득이라고 할 수 있다. 성남시는 시내에 3년 이상 거주한 만 24세 청년에게 분기에 12만5000원씩 연 50만 원어치의 지역 화폐(성남사랑상품권)를 지급한다. 청년 복지향상과 취업역량 강화를 위해 최소한의 기본권을 보장하자는 취지로, 소득과 일자리 유무와 관계없이 지원한다.

서울시도 청년배당과 유사한 청년수당을 저소득 '취준생'들을 대상으로 도입하려 하고 있다. 서울시는 미취업자나 졸업예정자 가운데 중위 소득 60% 이하인 청년 3천 명에게 최장 6개월간 월평균 50만 원을 지급하려고 한다. 청년배당이나 청년수당은 무상복지, 선심정책 논란을 일으키고 있으며, 중앙정부가 반대하고 있다.

지난달 9.7%를 기록한 한국 청년실업률은 올해 2월부터 매달 동월 기준 역대 최고치를 갈아치우고 있다. 체감 청년실업률은 34%에 이른다. 청년 '취업절벽'은 중장년층의 조기 퇴직과 맞물려, 일자리를 놓고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가 다투는 세대 갈등 양상을 보인다. 기본소득이 전면 도입되면 다른 복지 혜택은 폐지한다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면 여러 복지 제도를 실시하는 데 따른 비용을 줄일 수 있다.

기본소득 도입에 가장 큰 장애는 재원이다. 우리나라에서 월 30만~50만 원의 기본소득 제도를 도입한다면 연간 200조~300조 원의 세금을 더 걷어야 할 것으로 추산됐다. 실현 가능성에 회의적인 시각이 많지만, 투기소득과 불로소득 중과세, 기금 등으로 재원 확보가 불가능하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 기본소득 도입은 일하지 않는 인간이 행복할 수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할 전망이다. 기본소득이 노동윤리를 파괴하고 임금 삭감을 조장할 것이라는 비판도 있다. 국내외에서 로봇이 인간을 대체해 '고용 없는 미래'가 현실화하고, 양극화가 심해지면 기본소득 논의가 활발해질 것 같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