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소 만들면 뭐해" 밀려나는 '을(乙)'을 지켜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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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소 만들면 뭐해" 밀려나는 '을(乙)'을 지켜주세요
  • 연합뉴스
  • 승인 2016.07.14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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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는 거리→밀려나는 '을'…지자체들 '젠트리피케이션' 방지책 골몰
건물주·임차인·행정기관 자율협약…임대료 억제, 호객행위 자제 노력
▲ 광주 동구 동명동 카페거리. 사진=연합뉴스

"40계단을 살린 건 시청에서 조성한 조형물이 아니라 싼 임대료를 찾아 이곳에 정착한 예술인들이에요. 하지만 거리가 '뜨자' 치솟는 임대료 때문에 예술인들이 '뜨고' 있네요."

피난민의 판자촌과 부두에서 들어오는 구호물자를 파는 행상들이 늘어섰던 부산 중구 중앙동 40계단.

200여개의 인쇄·출판 업소가 모인 인쇄 골목 사이에 자리 잡은 40계단은 작가들이 벽화 그리기 등 지역민과 함께하는 예술활동을 하며 죽은 상권을 살려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상권이 살아나자 임대료 상승으로 이어졌고 일부 극단이나 공방이 불가피하게 자리를 옮겨야 했다.

▲ 부산 중구 40계단길. 사진=연합뉴스

특색있는 '명소'로 성장한 전국의 수많은 '뜨는 거리'에서 임대료 폭등→원주민 퇴출→정체성 훼손→상권 쇠락의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14일 전국 주요 지자체들에 따르면 구도심 상권 활성화로 임대료가 급등하면서 원주민과 영세상인이 내몰리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은 결국 임차인뿐 아니라 건물주와 부동산 업계, 지역사회의 피해로 이어진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이해 당사자들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해결책을 찾고 있다.

◇ 광복로·한옥마을·바오젠거리…인기만큼 치솟는 임대료 "못 버텨"

▲ 부산 중구 광복로. 사진=연합뉴스

부산 원도심의 대표 상가인 광복로는 1990년대 초 부산시청이 다른 곳으로 옮기면서 상권이 침체했다.

상가는 비고 손님도 줄어 한때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던 광복로는 지역상인과 지자체의 노력으로 최근 5년새 과거의 명성을 되찾았다.

그러나 소위 목 좋은 1층 상가 기준 월 2천만∼3천만원 수준이었던 임대료가 5천만원까지 치솟으면서 30년 넘게 장사를 해오던 한 유명 브랜드 의류매장이 철수하는 등 임대료를 내지 못해 가게를 빼는 곳들이 나타났다.

▲ 전주 한옥마을 야경. 사진=연합뉴스

전주 한옥마을도 젠트리피케이션의 폐해가 심한 곳 중 하나다.

700여 채의 한옥이 밀집한 한옥마을은 관광객이 몰리자 4∼5년 전부터 은행로와 태조로 등 주요 도로 갓길 한옥 주인들이 점포와 상점, 식당으로 개조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 과정에서 66㎡ 남짓한 한옥의 월 임대료가 최고 800만원까지 치솟는 등 부작용이 발생했다.

수도권에 거주하는 개인들이 한옥 전체를 사들이거나 임차계약을 맺은 뒤 재임대하는 사례도 늘면서 많은 원주민이 한옥마을을 떠나고 있다.

현재 한옥마을에는 음식점만 174개이고 한복대여점과 액세서리 판매점까지 합치면 250여개가 넘는 업소가 성업 중이다

전주시는 지난해부터 한옥마을 안에 현장 사업소를 설치하고 지나친 상업화를 제한하는 행정단속을 벌이고 과도한 임대료 징수나 한옥마을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업종 변경 등은 관련 조례와 시행규칙을 적용해 막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 제주 바오젠거리 상인 기자회견. 사진=연합뉴스

'제주속 작은 중국'이라 불리는 제주시 연동의 바오젠거리도 중국인 관광객이 몰리면서 최근 3∼4년 사이 건물 임대료가 2∼3배나 올랐다.

높은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한 영세상인들이 밀려난 자리에는 중국인들이 선호하는 대형 화장품 매장들이 들어섰다.

새 건물주가 기존 세입자를 내쫓고 자신이 직접 중국인을 대상으로 한 가게를 여는 사례도 생겼다.

지역 상인단체인 '맘편히장사하고픈상인모임'과 제주참여환경연대 등은 2014년 기자회견을 열고 법 규정보다 임대료를 올려받는 관행을 폭로하며 대책을 촉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임대료 폭등 문제는 좀처럼 해소되지 않았고 지난해 10월 31일에는 바오젠거리의 쇼핑센터에 점포를 운영하던 김모(53)씨가 건물주와 임대료 문제로 다툰 뒤 시너를 건물에 뿌려 방화를 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 벌어졌다.

다른 대도시들도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다.

▲ 대구 방천시장 김광석 동상. 사진=연합뉴스

대구 방천시장과 김광석길 일대에는 5년 전까지만 해도 음식점이 5곳 안팎에 불과했으나 지금은 100곳이 넘는다.

상권이 갑자기 커지면서 영세 상인과 예술 종사자들이 치솟는 임대료를 견디지 못하고 자리를 내줬다.

동촌유원지도 행락객의 발길이 늘면서 막걸리에 파전을 팔거나 매운탕, 칼국수 등을 팔던 소규모 식당은 거의 사라지고 대형 프랜차이즈 음식점과 카페가 그 자리를 메웠다.

대전의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대흥동과 은행·선화동에는 원룸을 비롯한 다가구주택이 대거 들어서면서 기존 역사문화시설이 내쫓겼다.

올해 초 대흥동 명소였던 프랑스문화원이 퇴거 통보를 받았으며 이 자리에는 원룸이 들어설 예정인 것으로 전해졌다.

대전시는 근대 문화시설 보존·활용과 도시재생 시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지만 많은 건물주들은 수익을 쫓아 옛 건물을 밀고 원룸 한 칸이라도 더 지으려 하고 있다.

광주의 대표적인 부촌이었다가 시·도청 이전으로 쇠락한 광주 동구 동명동은 처음에는 저렴한 임대료와 국립아시아문화전당과의 접근성 덕분에 지역 예술인과 문화창업자들의 거리였다. 하지만 최근에는 카페와 양식당 창업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3.3㎡당 300만원 안팎이던 땅값은 지난 3년 사이 카페 거리를 중심으로 20∼30% 올라 예술인들의 진입을 어렵게 만들고 있으며 광주 중앙도서관을 기점으로 반경 300m 안에 들어선 카페와 식당만 80곳이 넘는다.

◇ "또다시 텅 빌라" 임차인·건물주·지자체 '합심'

▲ 서울 성동구 젠트리피케이션 방지 협약식. 사진=연합뉴스

서울시는 홍대와 대학로, 신사동 가로수길, 압구정 로데오거리 등에서 젠트리피케이션이 현상이 극단적으로 나타나자 지난해부터 지자체가 직접 관여하며 대책을 마련했다.

서울시는 건물주와 임차인, 주민, 전문가, 공무원이 참여하는 '민관협의체'를 만들어 건물주는 임대료 인상 자제, 임차인은 호객행위 등 자제, 행정기관은 주변환경 개선을 지원하는 협약 체결을 유도하고 있다.

부산시도 시의 리모델링 지원을 전제로 장기임대 보장, 민관협의체 구성, 분쟁조정위원회 설치 등 원도심 상가 임차인 보호를 위한 조례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또한 부산 중앙동 예술인 창작공간 '또따또가'처럼 지자체가 직접 역사·문화적 가치 있는 부동산을 사들여 소공연장, 갤러리 등으로 활용하며 지역 정체성을 지키는 방안도 마련하기로 했다.

▲ 1913송정역시장. 사진=연합뉴스

죽어가던 재래시장에서 광주의 새 명소로 재탄생한 '1913송정역시장'의 건물주와 상인들은 상생발전 협약을 최근 체결했다.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을 근거로 향후 5년간 월세를 최대 9% 이상 인상하지 않도록 한다는 내용이다.

이들은 또한 시장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 신규 입점 시 직접 만든 상품만을 판매하도록 제한하고 프랜차이즈 및 신규 매장 입점 시 상인회의 동의를 거치도록 했다.

일찌감치 문을 닫아도 되는 부식가게나 방앗간, 빵집도 시장통의 활기를 위해 밤 10시가 넘도록 환하게 불을 켜기로 하는 등의 자율적인 상생 배려 덕택에 일일 200명 수준이던 시장 방문객은 4천명 이상으로 크게 늘었다.

정부가 현행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보다 강화된 법안을 시행해 개별 상인의 권리와 지역상권의 개성을 보호하고 도시 발전을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더불어민주당 홍익표 의원은 지난달 상가건물임대차 보호기간을 현행 5년에서 10년으로 연장하고, 최고 9%인 임대료 상한선을 전국소비자물가변동률의 2배 안에서 광역자치단체장이 고시하는 비율을 넘지 못하도록 하는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 일부개정법률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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