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드라마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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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드라마가 아니다
  • 연합뉴스
  • 승인 2016.07.18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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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현 연합뉴스 논설위원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배치를 놓고 나라가 흔들리고 있다. 한쪽에서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결단을 내렸다는데 다른 쪽에서는 국가를 해치는 일을 했다고 아우성이다.

나라 밖에서는 미국과 중국의 남중국해 패권 싸움이 세계의 갈등으로 비화하는 모습이다. 상설중재재판소가 중국의 남중국해 영유권 주장을 부정하는 판결을 하자 필리핀과 베트남의 후견인격인 미국은 재판 결과를 인정하라며 중국을 압박하고 있다.

문제는 우리나라의 처지다. 사드는 중국의 반발을 고려해 후방인 경북 성주에 배치하기로 했다. 감시 범위가 중국이 아닌 북한이라는 걸 정부는 어필한다. 배치 자체는 동맹인 미국, 입지는 전략적동반자인 중국의 눈치를 본 결정이다.

남중국해 문제에서도 미국과 중국은 서로 자국 편에 서라고 우리나라를 압박하고 있다. 이 때문에 정부는 어느 편도 들 수 없는 딜레마에 빠졌다. 미국은 해방 이후 줄곧 우리나라를 지켜준 맹방이자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다. 중국은 6ㆍ25 때 대군을 투입해 한국의 북진통일을 저지한 북한의 혈맹이지만 우리 수출의 26%를 점하고 있는 새로운 목숨줄이자 글로벌 패권을 꿈꾸는 세계 두 번째 강대국이다.

현재의 패권과 미래의 패권(아직은 불투명하지만)은 반드시 충돌하게 돼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미국과 중국 가운데 어느 편에 서야 할지 선택해야 한다. 양다리를 걸치는 건 평화시에나 가능하다. 큰 고래가 싸울 때는 중립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두 눈 똑똑히 뜨고 어느 쪽이 센지를 지켜봐야 한다. 강한 쪽에 붙어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 우리 역사가 그랬다. 우리 땅을 인도양이나 아프리카 해역쯤으로 들어 옮길 재주가 없는 한 이 건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을 지정학적 숙명이다.

14세기 말 중원에서 원나라와 명나라의 세력 교체(조선건국), 16세기 말엽 명나라와 일본의 동아시아 패권 다툼(임진왜란), 17세기 초반 명나라를 밀어낸 청나라의 대륙쟁탈(병자호란), 19세기 후반 청나라와 일본의 한반도 지배권 전쟁(조선 멸망) 등 600여 년간 우리의 운명을 가른 강대국의 쟁투는 4차례 있었다.

이 가운데 지배층이 제대로 시류를 읽고 대처한 건 원명 교체기 뿐이다. 그것도 내부 갈등을 관리하지 못하고 결국은 쿠데타로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를 바꿨다.

나머지 3차례는 조선이 전쟁터가 되거나 정벌을 당해 국토는 황폐화하고, 백성은 어육이 되거나 굶주려야했다. 이들 비극은 TV 사극에서 하도 많이 봐 국민이 스토리를 뚜르르 꿰고 있다. 우리나라처럼 역사드라마가 넘쳐나는 곳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처럼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 국민도 없다니 아이러니다.

▲ 치욕의 삼전도비...병자호란 당시 조선은 청에 50만명의 백성을 노예로 보낸 것도 모자라 청 태종의 공덕을 찬양한 비석까지 세워야 했다. 이 비석은 서울 송파구 석촌동에 있다. 사진=연합뉴스

역사적 비극의 공통점은 국가가 힘(경제력과 군사력)이 없고, 명분에 매몰됐다는 점이다. 임금과 신하가 패를 갈라 밤낮없이 권력투쟁을 하고 있었다는 점도 추가돼야 한다. 하지만 역시 가장 큰 비극적 결함은 시세의 흐름을 읽지 못한 지도층의 썩은 눈이었다.

청나라와 친교 해야 할 때 오랑캐와는 상종할 수 없다며 망하는 명나라를 섬기고, 일본의 동향을 면밀하게 주시하며 대책을 세워야 할 때 근본 없는 왜놈들이라고 무시했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고 동학이라는 이름으로 백성이 들고일어나자 청나라군과 일본군을 불러들였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나라에 가장 중요한 건 지역 혹은 글로벌 패권의 향방을 예측해 미리 대비하는 능력이다. 일단 그것만 제대로 하면 대책 없이 나라가 결딴날 일은 없다. 물론 지금은 평화기이므로 한쪽으로 올인할 게 아니라 주변 열강과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낭만시대가 오래갈 것 같지는 않다. 지구상 곳곳에서 일어나는 미국과 중국의 대립 첨예화는 우리에게 한쪽으로 줄을 설 것을 강요한다. 요즘은 좀 잠잠하지만, 중국의 GDP가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로 올라선 2010년 전후로 중국이 얼마 안 가 미국을 누르고 패권국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봇물을 이뤘다. 최근엔 중국이 이번 세기에 미국의 벽을 넘기는 어렵지 않겠느냐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운명을 함께할 나라를 선택할 때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국가의 안위, 명분이 아닌 실리를 중시해야 한다는 점이다.

고래들의 패권 전쟁에 휘둘리는 가련한 운명이 되지 않으려면 힘을 길러야 한다. 대하사극 『정도전』에서 정도전은 말한다. "국제관계에서 미사여구를 다 제외하고 남는 단 한 글자는 힘(力)이다." 열강 사이에서 힘의 균형추를 흔들 수 있는 수준이어야 스스로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 어느 나라도 한국을 마음대로 집어삼킬 수 없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을 정도의 힘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 정치권과 국민은 사드니 신공항이니 개헌이니를 놓고 다투느라 진을 뺄 여유가 없다. 일자리를 창출할 수 없을 정도로 내공이 바닥을 드러낸 나라의 힘을 어떻게 하면 단기간에 극대화할 수 있느냐를 갖고 피 터지게 싸워야 한다. 북한은 경제 대신 핵을 택했다. 핵만 안고 있으면 어떤 나라도 쉽게 넘볼 수 없다고 자신하는 듯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 국력을 쏟아 미래를 도모해야 하는가. 그걸 화두로 잡고 답을 내야 한다. 그 게 주변 열강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나랏일을 줏대 있게 결정할 수 있는 길이다. 주변 강국이 으름장 한 번 놓으면 냉정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어찌할 줄 몰라하며 서인과 동인, 주화파와 척화파, 훈구와 사림, 진보와 보수가 갈라져 싸움질하다 세월 다 보내는 자해적 바보짓을 언제까지 되풀이해야 하나.

임진왜란 7년간 백성은 절반으로 줄고 20만 명이 일본으로 끌려갔다. 병자호란 때는 임금이 적장에게 세 번 무릎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것도 모자라 청나라에 50만 명의 백성을 노예로 바쳤다. 대한제국의 종말로 백성은 36년간 종살이를 하고, 해방 후에는 나라가 둘로 갈라서야 했다. 역사는 소설이나 드라마가 아니다.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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