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자골프와 국가의 내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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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자골프와 국가의 내공
  • 연합뉴스
  • 승인 2016.08.29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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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회견하는 박인비

리우 올림픽 여자골프에서 박인비는 역사적 인물이 됐다. 마지막 라운드에 보여준 그의 자기통제와 위기관리는 대가(大家)의 풍모였다.

LPGA 랭킹 1위 리디아 고는 박인비의 금메달 경쟁자라기보다 마치 여제(女帝)의 카리스마를 다소곳이 견습하는 학동처럼 보였다.

박인비의 올림픽 금메달은 한국 여자골프가 다진 내공의 승리이기도 하다. 박세리가 1998년 LPGA US 오픈에서 맨발투혼으로 우승하며 뿌린 씨앗(꿈나무)들이 자라나 18년 만에 큰일을 낸 것이다.

국외자에게 한국 여자골프는 기적이다. 다른 엘리트 스포츠처럼 골프는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기 위해 국가가 전략 스포츠로 육성한 게 아니다.

아무런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은 곳에서 오직 골프 대디(DADDY), 골프 맘(MOM)들의 자녀에 대한 무모한 희망과 헌신으로 선수들이 '창조'됐다.

박세리 이후 좋은 선수들의 등장은 세계 무대에서 성적으로 연결됐고 이는 다시 선수 저변을 넓혀 국내 여자골프의 부흥으로 선순환하면서 연관 산업의 판을 키웠다. 돈과 명예를 위해 자녀의 가능성에 올인한 아빠, 엄마들의 투자와 여기에 호응한 기업체의 후원이 한국 여자골프를 세계 정상으로 끌어올렸다.

여자골프의 성공 스토리는 스포츠든, 산업이든, 인재 육성이든 방임과 불간섭이 고도의 정책이 될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어느 분야에서건 차원이 다른 수준으로의 비약은 발상의 전환을 요구한다. 230년 전 청나라를 여행한 연암 박지원은 넓은 길을 활발하게 오가는 수레에 충격을 받는다. 말과 노새가 끄는 수레는 오늘날의 화물트럭이다. 연암은 조선 백성이 찢어지게 가난한 이유는 수레를 이용할 줄 모르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전국의 물산이 활발히 유통되지 않기 때문에 부를 창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연암은 국가에서 수레 생산을 장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수레를 만들면 자연히 길도 넓게 닦일 것이고 그렇게 되면 유통의 혁신을 이룰 수 있다고 봤다.

길이 있어야 수레가 발전하는 게 아니라 수레를 만들면 길이 생긴다는 발상은 참신하고 도발적이다. 어린 선수들을 외국 투어에 보내 훈련을 시키고 성적을 내니 국내 여자골프가 활성화되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선수들의 실력이 놀라우리만큼 향상된 이치다.

혁신을 이끌 수 있는 내공은 하루아침에 쌓이지 않는다. 국가의 내공이란 사회 전반의 발전이 벽에 부닥치거나 위기에 처했을 때 이를 돌파할 수 있는 인적, 정신적, 경험적 힘의 총체라고 할 수 있다.

연암의 시대인 정조대 이후 조선이 망조에 빠진 것은 고갈된 내공을 충전하겠다는 의지도 능력도 없었기 때문이다. 퇴행적 세도정치가 횡행하면서 연암과 같은 북학파의 창의적 지성은 설 땅이 없었다. 망한 지 140년이 지난 명나라는 사모하면서 초강대 선진국인 청나라를 오랑캐라고 백안시하는 나라에 희망이 있을 수 없었다.

▲ 연암 박지원의 초상

연암의 소설 주인공인 허생의 눈에 조선 경제는 엽전 1만 냥만 있으면 매점매석으로 흔들 수 있는 한심한 수준이었다. 세계 문학사를 통틀어 여행기의 '명품'이자 조선 개혁의 방략이 담긴 연암의 『열하일기』가 금서가 된 건 조선의 불행이었다.

지금 우리나라가 정치ㆍ경제ㆍ사회적 변혁기를 맞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도 결국 내공의 부족이라고 봐야 한다.

우리 산업은 선진국의 기술 모방을 통해 역사상 유례없는 발전을 경험했지만, 성장모델이 한계에 직면하면서 새로운 발전의 돌파구를 열지 못하고 있다. 기술과 사람을 사는 데는 익숙해 있지만 새로운 먹거리를 스스로 창출하거나 창의적인 인재를 길러내지 못하면서 산업이 정체에 빠졌다.

우리 산업의 미래에 대한 서울공대 교수들의 제언을 정리한 『축적의 시간』에서 이정동 교수는 한국의 산업이 가마우지 경제(부품ㆍ소재를 선진국에 의존하는 실속 없는 수출)라는 놀림을 받는 것은 창조적 경험지식을 바탕으로 한 개념설계 역량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짚었다.

산업의 성패를 가를 '개념설계 역량'이라는 건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아니라 오랜 기간 지속해서 시행착오를 거쳐야만 얻어진다. 이는 일종의 집단지성 혹은 문화인 '축적된 경험'이어서 기업이나 사람을 사들인다고 확보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 교수는 기술 혹은 산업의 혁신을 가능케 하는 축지법이라고 했다.

이런 창의적 내공은 무협지에서처럼 영약으로 혈도를 뚫어 한순간에 키울 수는 없기에 국가적 역량을 결집해야 얻을 수 있다. 나라 경제가 진퇴의 기로에 선만큼 우리 정부와 정치권, 업계, 학계가 똘똘 뭉쳐 국가의 잠재력을 증대하기 위해 모든 기력을 쏟아부어야 할 때다. <김종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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