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재훈의 광화문별곡> 경보는 끊임없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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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재훈의 광화문별곡> 경보는 끊임없이 울렸다
  • 연합뉴스
  • 승인 2016.11.05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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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은 대선을 앞두고 있던 2012년 여름 한 토론회에서 "제가 국민의 선택을 받아 큰 책임을 맡게 되면 어떤 경우든지 제 이름을 팔아 하는 건 다 거짓말이고, 속지 않으셔야 한다는 말씀을 자신 있게 드린다"고 말했다.

자신이 대통령이 될 경우 정권 말 민심이반의 주된 원인이 돼 왔던 권력형 부패의 사슬을 확실하게 끊겠다는 대국민 약속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최소한 몇 차례의 기회가 있었다. 최순실 파문은 사전에 경보음이 끊임없이 울렸다. 인제 와서 알 만한 위치에 있던 모든 이들이 '모른다'고 발뺌하는 데 급급하지만, 권력 주변의 눈치 빠른 일부는 이상 조짐을 감지하고서도 애써 눈을 감는 비겁한 선택을 했거나, 오히려 그 부정에 편승했기 때문에 이 지경이 됐다.

최소한 2014년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문건 유출' 수사 때라도 바로잡았어야 했다. 당시에도 '비선 실세의 국정농단'이라는 표현이 꼬리표처럼 따라붙었고, 심지어 '사실은 최순실이 진짜 비선실세'라는 얘기까지 나왔지만 최 씨는 수사 대상에 오르지 않았다.

청와대 행정관 출신인 박관천 전 경정은 당시 검찰 수사 과정에서 "우리나라 권력 서열은 최순실 씨가 1위, 정윤회 씨가 2위, 박 대통령은 3위에 불과하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지만,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검찰이 그때 비선실세 의혹의 실체에 접근했더라면 이 참담한 상황 까진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역량 부족이었다면 그 무능함에 석고대죄해야 하고, 정치적 배경 때문에 의혹을 덮었던 것이라면 지은 죄가 크다.

최 씨 일가와 관련된 의혹은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과정에서도 공방의 대상이었다. 본선보다 더 치열했던 당시 경선에서 양측은 '검증 전면전'을 치렀고, 그때 이명박 후보 측은 "박근혜 전 대표가 대통령이 될 경우 최 씨 일가에 의해 국정이 농단될 개연성이 없겠느냐"고 공격했다.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위기는 사전 신호를 무시하고 간과한 결과로 빚어진다.

올해 초 우리나라에서 개봉된 영화 빅쇼트(The Big Short)는 2008년 금융위기를 초래한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를 예측한 투자로 엄청난 돈을 벌어들인 4명의 금융인 얘기를 담고 있다. 저금리 정책이 낳은 무분별한 부동산 투자가 비극적 결말로 나타나기 전 현장에서는 여러 신호가 있었고, 이들은 그 조짐을 예리하게 포착해 위기를 오히려 기회로 만들었다.

마찬가지다. 지금 터지고 있는 국정농단 의혹의 신호는 이미 오래전부터 발신되고 있었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되도록 방치하지 말고, 누구라도 나서서 고름을 미리 짜내고 썩은 살을 도려냈더라면 이 황망함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블랙 스완'(검은 백조·Black Swan)이라는 용어는 극단적으로 예외적이어서 발생 가능성이 없어 보이지만 일단 발생하면 엄청난 충격과 파급효과를 가져오는 사건을 가리킬 때 종종 사용하는 말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블랙 스완이라는 말은 더욱 주목받았다.

반면 '회색 코뿔소'(Gray Rhino)라는 말은 미국의 싱크탱크인 세계정책연구소 미셸 부커 소장이 2013년 다보스포럼에서 발표한 개념으로, 블랙 스완처럼 좀체 발생하지 않아 누구도 예측할 수 없고 대비하기 어려운 돌발 사태와는 달리 '위험 신호를 내뿜으며 돌진하는 위기'를 가리킨다.

부커 소장은 저서 『회색 코뿔소가 온다』에서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많은 사건, 사고는 어느 날 갑자기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경고 신호를 보내고 사전에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새로운 의혹이 제기될 때마다 상상력의 한계를 시험하는 최순실 파문은 경보를 꾸준히 울려 왔던 회색 코뿔소이자, 이전엔 상상도 못 했던 정치적 블랙 스완이기도 하다. 이제 다시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이 땅에서 벌어지지는 않도록 우리가 모두 정신 차려야 한다. <황재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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