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왕훈의 데자뷔> 워터게이트의 교훈
상태바
<추왕훈의 데자뷔> 워터게이트의 교훈
  • 연합뉴스
  • 승인 2016.11.19 19: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제37대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 사진=연합뉴스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 사건은 현직 대통령이 범죄행위에 연루된 것으로 의심을 받아 거센 사퇴압력에 직면한 점에서 미국의 제37대 대통령 리처드 닉슨의 사임을 불러온 워터게이트 스캔들을 떠올리게 한다.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 세계 어느 곳에서건 권력형 비리 사건에 '~게이트'라는 이름이 붙은 것처럼 최순실 씨가 중심이 된 의혹 역시 '최순실게이트'로 흔히 불리고 있다.

워터게이트 스캔들은 닉슨 대통령이 재선을 위한 선거운동 채비를 본격화할 무렵인 1972년 6월 17일 야당인 민주당 전국위원회(DNC) 사무실에 침입해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던 5명의 괴한이 경찰에 체포되면서 시작됐다. DNC가 입주한 워싱턴DC 포토맥 강변의 빌딩 이름이 바로 워터게이트다. 워싱턴포스트의 칼 번스타인과 밥 우드워드 기자의 최초 보도로 이 사건이 알려진 후 언론의 추적 보도가 잇따르면서 이 사건에 닉슨 행정부 주요인사는 물론 닉슨 대통령 자신이 연루됐다는 의혹이 점점 확산했다.

의회가 진상 규명에 나섰고 특별검사가 임명돼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했다. 이듬해인 1973년 10월에는 아치볼드 콕스 특별검사가 백악관 집무실에서 오간 대화 내용을 녹음한 테이프 제출을 요구했다가 이를 거부한 백악관 측과 마찰을 빚은 끝에 해임됐다. 거기에다 문제의 테이프 가운데 1972년 6월 20일의 대화 18분가량이 삭제된 사실이 드러나는 등 정권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사건의 진상을 은폐하려 했다는 정황이 드러났다. 닉슨 대통령은 민주당 도청은 자신과는 무관한 일이며 진상 은폐를 지시한 적도 없다고 밝혔으나 여론은 악화할 뿐이었다.

닉슨 대통령의 불법적인 금품 수수와 탈세 등 개인적인 비리까지 불거져 마침내 의회가 탄핵에 나설 움직임을 보인 가운데 대법원은 1974년 7월 문제의 테이프 녹취록이 아닌 원본을 전부 공개하라는 결정을 내렸다. 법원의 결정에 따라 공개된 테이프 가운데는 DNC 침입사건 직후 닉슨 대통령이 이에 관한 보고를 받고는 조사 축소를 지시하는 내용의 대화가 담겨 있었다.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여당인 공화당 지도부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오히려 탄핵안 통과가 확실하다는 답변을 듣고는 결국 8월 9일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워터게이트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후 약 2년 만이다.

대통령이 개입한 정권의 불법 행위에 온 국민이 분노하고 퇴진을 요구하는 여론이 들끓는데도 당사자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면서 버티는 양상은 지금 우리나라의 상황과 유사한 점이 있다. 그러나 당시 미국에서도 '헌정의 위기'라는 말이 회자됐지만, 실제로 나라가 결딴날 것 같은 경제나 안보상의 위기는 없었다. 이런 사건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고 그 자체가 국가적 불행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사건의 실체적 진실이 비교적 명백히 드러난 상황에서 대통령이 탄핵을 당하는 대신 자진 사퇴를 선택한 것은 최선의 수습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1974년 8월 9일 대통령직을 사임한 리처드 닉슨이 헬기로 백악관을 떠나기에 앞서 직원들에게 두 팔을 치켜들며 인사를 건네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1974년 8월 9일 대통령직을 사임한 리처드 닉슨이 헬기로 백악관을 떠나기에 앞서 직원들에게 두 팔을 치켜들며 인사를 건네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지금 우리 상황과 마찬가지로 당시 미국에서도 닉슨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높았지만, 그의 사임을 끌어낸 것은 '거리의 함성'이 아니라 제도의 틀이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딥 스로트(Deep Throat)'로 불렸던 내부 고발자의 제보와 이를 끈질기게 추적 보도한 언론에 의해 자칫 묻혀버릴 뻔했던 정권의 악행이 세상에 드러나게 됐고 특별검사와 의회, 법원 등이 직분을 다했기에 국민은 사건의 진상에 다가갈 수 있었다. 무엇보다 '질서있는 마무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현실을 냉정하게 설득해 대통령의 자진 사퇴를 유도한 공화당 지도부였다. 닉슨의 후임자가 될 제럴드 포드 당시 부통령 역시도 퇴임 후 '신변 안전'을 약속함으로써 그가 퇴임을 결심하도록 도왔다. 포드는 대통령직을 승계하자마자 워터게이트 사건과 관련한 일체의 형사소추로부터 닉슨을 사면해 사건을 종결지었다.

그 후의 일은 전반적으로 '해피 엔딩'이라고 할 만하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물론 미국 정치사에 오명으로 남게 됐지만, 오랜 트라우마를 남긴 비극에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미국 역사상 최초로 현직에서 사퇴한 대통령이란 불명예를 안은 닉슨은 그 대신 미국 최초로 탄핵당한 대통령이라는 굴레는 벗을 수 있었다. 그가 사면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 물러나는 길을 택해 후임자 포드에게 그나마 최소한의 명분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끝까지 버티다 탄핵을 당했다면 아마도 감옥행을 피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퇴임 후 그는 저술활동과 전직 대통령으로서 외교활동에 전념해 어느 정도 명예를 회복했다.

다른 역대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닉슨 역시 1990년 고향인 캘리포니아주 요바린다에 자신의 이름을 딴 기념도서관을 설립하는 영예를 누렸다. 이 도서관 개관식에서 조지 부시(아버지) 당시 대통령은 닉슨에 대해 "진정한 평화의 설계자로서 미국은 물론 세계의 진로를 바꾸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고 찬사를 보냈고 수천 명의 주민과 지지자들이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1994년 향년 81세를 일기로 별세한 후에도 미국 국민은 워터게이트를 잊지 않았지만, 이제는 중국과 외교관계 수립, 소련과의 군축협정 등 그의 업적도 함께 기억하는 균형감을 갖게 됐다.

▲ 미국 워싱턴DC 포토맥 강변에 있는 워터게이트 빌딩. 사진=연합뉴스

닉슨을 사면한 제럴드 포드와 공화당은 닉슨의 퇴임 후 처음으로 치러진 전국선거인 1976년 대선과 의회 선거에서 참패함으로써 대가를 치렀다. 그러나 그 뒤 1980년 선거에서는 대통령직을 탈환하고 상·하원의 의석을 크게 늘리는 등 공화당의 워터게이트 후유증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닉슨의 자진 사퇴 결심을 받아내지 못하고 일이 꼬였다면 공화당은 존립이 위태로워졌을지도 모른다.

먼 훗날에 되돌아봤을 때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은 어느 정도의 상처를 남기게 될까.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은 어떤 지도자로 기억될까. 40여 년 전 미국에서처럼 박근혜 대통령이 자진해서 사퇴한다면 사태가 무난히 마무리될 것이라고 단순히 생각할 수는 없다. 최 씨의 국정농단에 박 대통령이 어느 정도 연루됐는지에 관해서는 법적으로 다퉈야 할 부분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일이 아무것도 아닌 양 넘어갈 수는 없다는 점이다.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하기는 어려워도 아직 워터게이트 스캔들이 보인 수준의 엔딩을 기대할 여지는 있다고 믿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대통령, 여야 정치권, 검찰, 앞으로 임명될 특별검사 등 모든 플레이어의 역사적 혜안이다. <논설위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