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때까지 일해야"…베이붐세대들 은퇴 후 뭘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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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때까지 일해야"…베이붐세대들 은퇴 후 뭘하나
  • 연합뉴스
  • 승인 2016.11.20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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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부머 6인에게 들어보니…집 줄이고 투잡뛰고 경비원놓고 경쟁
하는 일도 가지가지…창업, 알바, 귀농에 늦깎이 공무원까지

"생존을 위해 죽을 때까지 일해야 한다는 공포에 눌려 사시는 어르신들도 참 고단할 겁니다"

은퇴한 베이비붐 세대가 재취업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올해 2분기 60세 이상 취업자가 20대 취업자를 앞질렀다는 소식에 한 누리꾼이 SNS에 올린 글이다.

베이비붐 세대는 대한민국 전체 인구의 14%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베이비붐 세대 은퇴의 출발선을 끊은 1955년생 양띠 인구는 올해 만 61세를 맞아 기업의 평균 정년이 57세 전후인 점을 고려하면, 이들의 대부분이 지난 4∼5년 사이 은퇴했을 가능성이 크다.

생존을 위해 은퇴 이후에도 경제활동에 나서는 대한민국 베이비붐 세대의 고담함을 엿봤다.

▲ 재취업에 뛰어든 베이비붐 세대. 사진=연합뉴스

◇ 퇴직 후 '투잡' 뛰어도 월급은 반토막

광주의 김선미(59·여·가명)씨는 3년여 전 평생 다니던 공장을 퇴직했다.

김씨가 다니던 공장에서는 퇴직한 직원을 파견직으로 재취업시켜주기도 했지만 노령에 기능이 저하된 청력이 공장 기계의 소음을 견디지 못한다는 건강검진결과가 발목을 잡았다.

또 한꺼번에 퇴직한 동료들 사이의 치열한 재취업 경쟁에서 이길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몇 푼 안 되는 퇴직금을 손에 쥐긴 했지만 그마저도 장성한 아들의 결혼 비용에 보태 거의 써버렸다.

자식들도 살기 팍팍한 사정을 알기에 용돈을 받아쓰기 껄끄러워 김씨는 다시 거리로 나갔다.

내일이 아닐 것만 같았던 건물 화장실 청소 등 허드렛일도 해보고, 취업에 도움이 될 거 같아 장애인보호사 교육도 수료했다.

그러나 안정적이고, 편한 직장은 퇴직 직후 더는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어렵사리 구한 새벽 배달일에 저녁 청소일까지 두 개의 일을 휴일 하루 없이 하고 있지만, 월급은 고작 100만원을 넘기기 힘들다.

다른 직장을 구해보려 수소문해봐도 "당신 말고도 일할 사람 많다"는 싸늘한 대답만 돌아왔다.

몸은 고되고, 아직 반평생 남은 인생이 갑갑해 한숨이 절로 나오지만, 김씨는 오랜만에 집을 찾은 아들 내외가 용돈이라고 내민 하얀색 봉투를 "엄마도 직장 다닌다"며 슬그머니 다시 밀어냈다.

◇ 은퇴 후 자녀 위해 집 줄인 아버지

박경호(63·가명)씨는 전형적인 은퇴한 베이비부머다. 경기 수원에서 30여 년간 일하던 직장에서 은퇴한 지 3년째 접어들었다.

매일 아침 출근해 온종일 책상에 앉아 무역 일을 보던 것이 이제는 아련한 추억이 됐다.

직장에 다닐 때는 월평균 400만 원이 넘는 월급으로 남매인 두 자녀를 키웠다.

다행히 아들과 딸이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취업에 성공해 박 씨의 어깨를 가볍게 했지만, 회사 근처에 원룸을 얻어주느라 목돈이 필요했다.

결국 박씨는 퇴직 직후 10여 년간 살던 영통구 매탄동의 41평 아파트를 팔고 권선동의 24평 빌라로 이사했다.

살림살이를 줄여 마련한 돈 3억여원으로 두 자녀의 원룸 전세금을 대주었다.

박 씨는 "어쨌든 자식들이 취업을 해주니까 부모의 어깨를 조금은 덜어준 것 같다"면서 "얼마 안 되더라도 월급을 잘 모아 자기들 결혼자금에 보태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 씨는 현재 특별한 직업을 얻지 못해 다달이 나오는 250만원 가량의 연금으로 생활하고 있다. 이 가운데 생활비와 경조사비 등을 제외하고 나면 월 100만원 정도밖에 여유가 없다.

그래도 빚이 없어 쪼들리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라는 박 씨는 조만간 베이비부머를 위한 취업박람회 등을 찾아다니며 일자리를 구해 볼 생각이다.

▲ 베이비부머 일자리 박람회'북적북적'. 사진=연합뉴스

◇ 베이비부머끼리 경비원 놓고 경쟁 "60대는 명함도 못 내밀어"

이광술(65)씨는 조선소에서 오랫동안 배관공으로 일하다 허리를 다쳐 2012년 일터를 떠났다.

조선소 사내외협력업체 소속으로 경남 거제시와 통영, 전남 목포 등에 있는 여러 조선소를 옮겨 다니며 25년간 속칭 '조선밥'을 먹었다.

2005∼2009년 사이 조선호황기 때는 일감이 넘쳐 하루 일당이 20만원이 넘을 때도 있었고 월 400만~500만원은 쉽게 벌었다.

국민연금 등 노후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았고 월급은 2007년 통영시에 신축한 31평대 아파트를 사느라 이씨는 노후에 쓸 여윳돈을 모아놓을 여유가 없었다.

퇴직한 그는 아파트 경비원, 공장 야간경비, 양식장 관리인 등 여러 군데 이력서를 넣었다.

그러나 명퇴한 40~50대는 물론, 20~30대 외국인 근로자 등 훨씬 젊거나 인건비가 저렴한 인력들과 경쟁해야 해 번번이 일자리를 얻는 데 실패했다.

이 씨는 "옛날엔 아파트 경비원을 60대들이나 하는 줄 알았는데 요즘은 회사서 잘린 50대들도 많이 하려고 하더라"며 "나이에 밀려서 잘 안 뽑히더라"고 털어놨다.

편의점 일자리도 알아봤으나 저녁 8시부터 다음날 6, 7시까지 하는 야간근무가 너무 힘들어 며칠 버티지 못하고 그만뒀다.

현재 이 씨 가정은 부인이 분식집에서 일하며 버는 월 150∼180만원 외에는 고정적 수입이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팔아서 생활자금에 보탤 아파트라도 한 채 남아있다는 것이다.

◇ 잘 나가던 어업인에서 귀촌해 '약초박사'로 변신

소백산 자락인 충북 단양군 어상천면으로 4년 전 귀촌한 최득수(59)씨는 어업인에서 '약초박사'로 변신해 제2의 삶을 살아간다.

최씨는 2012년까지만 해도 충남 서천에서 잘 나가던 어업인이었다.

배도 6척 거느리고 낚싯배 선장도 겸하면서 남부러울 게 없었지만 은퇴 후 숨겨진 '약초본능'은 어쩔 수 없었어 귀농했다.

동양란 동호회 활동을 하던 최씨는 2000년 무렵부터 약초에 관심을 두게 됐고 10년 넘게 이 섬 저 섬을 다니며 약초를 캐기 시작했다.

약초에 관한 전문지식을 공부해 약용식물 관리사, 건강식이요법사 등 관련 자격증도 여러 개 따서 '약초도사'라는 별명도 갖게 됐다.

단순히 채취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던 그는 약초 재배를 시도했지만 서해안 지역은 기후가 맞지 않아 재배가 쉽지 않았다.

결국 약초 재배에 적합한 서늘한 지역을 찾아 2012년 단양으로 귀촌했다.

지금은 2만5천평(8만2천644㎡)에서 곰취, 하수오, 명이나물, 산양산삼 등 각종 나물과 약초를 재배하고 있다.

또 단양뿐 아니라 제천, 영월 등 인근 지역에 약초 관련 강의도 나가고 약초 공부와 체험을 하고 싶다며 관광버스를 대절해 먼 길을 마다치 않고 찾아오는 도시인들에게도 지식을 전수한다.

자녀들이 모두 성장해 출가하고 혼자 생활하지만 약초를 벗 삼아 사는 삶은 전혀 외롭지 않다고 한다.

최 씨는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니까 삶이 편안하고 행복하다"며 "뜻이 맞는 사람들과 영농법인을 설립해 많은 이들에게 약초 체험과 실습을 제공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 퇴직금 투자해 창업 나섰지만 "언제 망할지 몰라 조마조마"

최상근(57·가명)씨는 10여년 전 대구의 한 은행에서 희망퇴직했다.

퇴직금 3억원으로 주식 투자했지만, 수익이 나지 않아 아내(55)와 함께 6천만원을 투자해 대구 북구에 커피숍을 차렸다.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고, 시장조사도 해보고 1년여 준비하며 공들였다.

18평 규모의 작은 커피숍이지만 창업 초기 매출이 50∼100만원에 달하는 등 처음에는 장사가 어느 정도 되는 듯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주변에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들이 하나둘씩 늘어가면서 공치는 날들이 늘어가고 있다.

창업 초기에는 격려하던 주변 지인들은 전문성도 없이 덜컥 가게를 차려 손해를 보게됐다고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내고 있다.

결국 5천만원의 손해를 껴안고 창업한 가게를 접어야 할지, 이어가야 할지 최씨는 갈림길에 섰다.

최씨는 "퇴직금으로 창업하려고 수천 번 살피고 고민해도 결국 손해를 보게 됐다"며 "사업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 정년 4년짜리 9급 공무원 도전해 합격한 전직 증권맨

올해 만 56세, 부산 '최고령 막내공무원'이 된 김진용씨도 베이비붐 세대다.

그는 올해 하반기 지방직 9급 공무원 시험에 도전해 합격한 뒤 발령지인 부산 금정구청에 지난 16일 처음 출근했다.

그는 2년 전까지만 해도 국내 한 대형 증권사에서 근무한 '증권맨'이었다.

1985년 처음 입사해 29년 동안 증권업계에 몸담았다. 기업경제 분석 업무를 주로 하면서 능력을 인정받아 부산 경남 지역에서 지점장을 두 번 맡기도 했다.

그랬던 그도 2014년 '명예퇴직'이라는 칼바람을 피하지 못했다.

퇴직금과 예금으로 막연하게 창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몇 번 한 적이 있었지만, 막상 회사를 떠나자 계획에 옮길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가 공무원을 꿈꾸게 된 것은 한 신문을 보고 나서다.

58세의 나이로 국내 최고령 신입 공무원이 된 서울의 한 기초단체 공무원의 기사를 보게 됐다.

김씨는 이날부터 매일 도서관을 찾아 공무원 시험을 독학했다. 모든 시간을 공부만 하는데 쏟아 반년만인 올해 하반기 합격하는 성과를 이뤘다.

김씨는 부산에서 '최고령 신입' 기록을 세웠다. 금정구청에 함께 발령받은 동기(19)와는 무려 37살의 나이 차가 난다.

김씨는 공무원 정년인 60세까지 만 4년가량을 일하게 된다.

베이비붐 세대로 조기 퇴직 이후 일자리 찾을 때 느낀 고통과 자식 세대의 일자리를 빼앗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느끼는 미안함이라는 복잡한 두 감정은 김씨가 공부를 시작할 때부터 고민해왔던 화두다.

김씨는 '일자리 경제과'에서 일하며 미안함을 '청년 일자리 창출'로 갚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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