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용의 글로벌시대> K팝의 창세기 쓴 김시스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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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용의 글로벌시대> K팝의 창세기 쓴 김시스터즈
  • 연합뉴스
  • 승인 2017.01.24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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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시스터즈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다방의 푸른 꿈' 포스터

1959년 1월 9일, 앳된 얼굴과 가녀린 몸매의 동양 소녀 세 명이 미국에 발을 디뎠다. 김시스터즈의 세 멤버 숙자·애자·민자였다. 이들은 라스베이거스 선더버드호텔의 쇼프로그램 '차이나 돌 레뷔'(China Doll Revue)에서 춤과 노래와 악기 연주를 선보였다. 관객의 반응이 시원치 않으면 3개월 만에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가혹한 조건이었으나 폭발적인 호응이 일면서 다른 호텔에서도 공연 요청이 쇄도했다. '한류의 원조', '걸그룹의 시조새'로 일컬어지는 김시스터즈가 팝의 본고장 미국에 안착한 순간이었다.

이들은 무대에 오를 때마다 "한국에서 온 김시스터즈입니다"라고 소개한 뒤 꼭 '아리랑'을 불러 한국과 한국 문화를 알리려고 했다. 그리고 다른 보컬그룹과의 차별화를 위해 무대에 설 때마다 악기를 바꿔가며 연주했다. 색소폰(숙자), 베이스(애자), 드럼(민자)을 중심으로 가야금, 장구, 기타, 트럼펫, 아이리시백파이프 등 10여 가지 악기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관객을 매료시켰다. 아리랑과 도라지타령 등 우리 민요를 들려줄 때 미국인들은 중국·일본과는 또 다른 신선한 느낌을 받았고 한국 동포들은 향수에 젖어 눈물을 흘렸다.

김시스터즈가 '라스베이거스의 샛별'에서 이른바 '전국구 스타'로 발돋움한 계기는 미국 최고의 버라이어티쇼로 꼽히던 CBS TV '에드 설리번 쇼'의 출연이었다. 이들은 비틀스, 엘비스 프레슬리, 롤링 스톤즈 등 당대 최고의 스타들이 등장했던 '에드 설리번 쇼'에 그해 9월부터 22번이나 얼굴을 내밀었다. 음반 제의도 뒤따랐다. 그룹 코스터스의 히트곡을 리메이크한 '찰리 브라운' 등 총 12곡을 수록한 첫 음반이 1960년에 출시됐다. 거의 모든 곡을 영어로 취입했으나 '아리랑'과 이난영의 노래를 리메이크한 '봄맞이'만은 한국어로 노래했다.

잡지와 방송의 평론가들도 김시스터즈를 호평했고 '라이프'지도 1960년 2월호에 특집 화보로 소개했다. 음반 타이틀곡 '찰리 브라운'은 1962년 빌보드 싱글차트에 올랐다. 공연 무대도 라스베이거스를 벗어나 뉴욕·시카고·로스앤젤레스 등으로 점차 넓어졌고 미국 밖으로도 진출했다. 1966년 유명 사회자 밥 호프와 함께 베트남에서 참전 미군들을 위해 위문공연을 펼치는가 하면, 같은 해 이탈리아·영국·프랑스·스페인·독일 등 유럽 순회공연에 나서고, 몬테카를로에서는 그레이스 모나코 왕비를 위해 특별공연을 열기도 했다.

한국 여성 중창단의 효시는 1939년에 이난영·박향림·장세정·이화자로 결성된 저고리시스터즈였다. 우리나라 가수가 미국에서 음반을 낸 것은 재미동포와 결혼해 도미한 가수 옥두옥(1956년)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명실상부한 최초의 아이돌 걸그룹이자 원조 한류 가수는 김시스터즈였다. 이들은 노래와 함께 춤과 연주 등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였으며, 한국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미국 관객에게 한국인의 흥과 신명이 뭔지 보여줬다.

김시스터즈는 '목포의 눈물'을 부른 불멸의 가수 이난영이 탄생시켰다. 뮤지컬 전문 'KPK악단'을 이끌던 남편 김해송이 6·25 전쟁 중 납북되자 홀로 7남매를 키우던 이난영은 열 살 남짓하던 영자·숙자·애자 세 자매를 1951년 미군 클럽 무대에 올렸다. 이들은 미국의 여성 보컬그룹 앤드루 시스터즈의 히트곡을 뜻도 모른 채 무작정 외워 노래했다. 1953년 수도극장(스카라극장)에서 일반 관객을 대상으로 공연을 펼쳤을 때는 큰언니 영숙 대신 이난영의 오빠인 작사·작곡가 이봉룡의 딸 민자(본명 이향)가 합류했다.

주한 미군 사이에서 김시스터즈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자 미국의 쇼 기획자 톰 볼이 새로운 흥행거리를 물색하려고 일본을 찾았다가 명성을 듣고 한국으로 건너왔다. 이들의 가능성을 눈으로 확인한 볼은 이난영과 계약을 체결했다. 그 자신이 최초의 여성 그룹 멤버이기도 했던 이난영은 딸과 조카에게 음악적 재능만 물려준 게 아니라 요즘 말로 탁월한 프로듀싱 능력을 발휘해 이들을 스타로 키워낸 것이다.

김시스터즈는 미국 진출 10년 만에 18인조의 개인 오케스트라를 거느리고, 푸에르토리코에 자신들의 호텔 나이트클럽을 열 정도로 돈을 벌었다. 스타더스트호텔 전속 시절 주급이 1만5천 달러에 이르러 라스베이거스 고액 납세자 6위에 랭크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연간 국민소득이 2천76달러일 때다. 1967년과 1968년 세 멤버는 외국인 음악가들과 차례로 결혼하고, 1970년 5월 조국을 떠난 지 12년 만에 귀국해 4일간 서울 시민회관에서 조국의 팬들을 열광시켰다. 1973년 사촌인 민자가 탈퇴한 후 1975년 큰언니 영자가 합류하면서 김시스터즈는 1951년의 구성원으로 돌아가 10년간 활동했다. 이들의 동생인 영일·상호·대성도 김브라더스란 이름으로 활동하며 김시스터즈와 하와이에서 합동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 영화 '다방의 푸른 꿈' 개봉을 앞두고 방한한 김시스터즈 멤버 김민자와 남편 토미빅이 20일 이화여대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시사회를 겸해 열린 미니 콘서트에서 재즈 연주를 선보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오는 26일 김시스터즈의 미국 진출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다방의 푸른 꿈'이 개봉된다. 영화 제목은 이난영의 동명 노래에서 따왔다. 2011년 김대현 감독은 1963년 김시스터즈와 이난영이 '에드 설리번 쇼'에서 노래를 부르는 영상을 보고 영화를 만들겠다고 결심한 뒤 2013년 헝가리로 날아가 막내 멤버 민자를 인터뷰하며 제작에 들어갔다고 한다. 이 영화는 2015년 제천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보이고 그해 EBS 다큐멘터리 페스티벌에도 초청됐다.

원더걸스는 미국에서 순회공연을 펼치며 빌보드차트에 이름을 올렸고, 싸이의 '강남스타일'은 유튜브 최고의 히트 상품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중국·일본과 동남아는 물론 유럽이나 남미에서도 한류 스타들의 춤과 노래를 따라 하는 젊은이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영화 개봉을 앞두고 한국을 찾은 김민자는 "우리에게 관심을 보여준 영화를 보며 슬프고도 기뻤다"면서 "김시스터즈란 이름을 꼭 기억해주면 좋겠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한 중년 영화감독의 관심이나 일부 팬들의 기억에만 그치기에는 이들의 존재가 너무나 우뚝하다. 현재 전성시대를 누리고 있는 K팝 현상이 언제 씨앗이 뿌려졌고 어떻게 뿌리 내렸는지 궁금하다면 창세기라고 할 수 있는 김시스터즈의 미국 시장 진출 분투기쯤은 알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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