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로 칼럼] 블랙리스트, `무오류'라는 권력 망상의 파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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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로 칼럼] 블랙리스트, `무오류'라는 권력 망상의 파편
  • 연합뉴스
  • 승인 2017.01.25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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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블랙리스트는 존재했다. 대통령은 물론이고 주무 장관까지 "본 일이 없다"고 공개적으로 부인했지만, 진실은 그게 아니었으니 더 허탈하다. 박근혜 정권에서 블랙리스트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계기는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그렇게 많지 않은 인원이 블랙리스트에 올랐다가, 이후 여러 차례 업데이트 과정을 거치면서 최종적으로는 1만여 명의 문화ㆍ예술인이 솎아내기 대상이 됐다는 게 정설인 듯하다. 블랙리스트를 만든 까닭은 정부에 비판적인 문화ㆍ예술계 인사를 가려내 국가의 지원금을 받지 못하도록 하는 데 있었다. 아마도 뿌리를 말리면 잎이 시들고, 꽃망울을 맺지 못할 것이라고 믿었던 모양이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보장한 헌법 정신을 해친 중대한 범죄행위라는 특검의 규정이 아니더라도 블랙리스트의 작성, 실행은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용납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블랙리스트 사태를 바라보며 내내 머릿속에 맴돈 생각이 있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기획하고 시행을 강요했으며, 전방위로 대상을 넓혀갔을까. 얼마나 그 위력이 지속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을까. 포용과 통합이 아니라 이런 배제와 박탈의 정치가 반작용만 남긴 채 그 힘의 원천인 권력과 함께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단순한 이치를 깨닫지 못한 이유는 뭘까.

'블랙리스트(blacklist)'라는 영어 단어가 최초로 등장한 때는 영국의 왕 찰스 2세 때다. 청교도 혁명이 실패하고 왕정복고로 왕위에 오른 그는 아버지 찰스 1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정적들의 이름을 모은 리스트를 만들었는데 그걸 블랙리스트라고 했다고 한다. 물론 찰스 2세의 블랙리스트는 우리가 말하는 블랙리스트와는 성격이 약간 다르다. 그건 역사에서 흔히 등장하는 '살생부'다. 지금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블랙리스트와 가장 근접한 사례는 아무래도 1950년대 미국을 강타한 공산주의자 색출 열풍이다. 당시 상원의원 매카시는 "미국 내에서 암약하는 (공산주의자) 명단을 갖고 있다"고 폭로했고 할리우드는 색출 광풍에 휘말렸다. 피해자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지만, 매카시는 마지막까지 아무런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고 정치현장에서 퇴출당하고 말았다. 초라한 결말이다.

역사에서는 종종 블랙리스트의 망령이 되살아나곤 했다. 블랙리스트가 담고 있는 '배제의 인간학'은 권력자에게 그만한 유혹을 가진다. 특검 조사에 따르면 박근혜 정권 핵심부는 좌파 문화ㆍ예술계 인사들이 너무 득세하고 있다며 이들을 정부지원에서 제외한다는 목표를 세웠다고 한다. 정부지원이라는 물길이 닿지 않은 쪽은 자연히 도태되고, 입맛에 맞는 문화환경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믿지 않고는 이런 착상을 할 리가 없다. 기껏해야 한시적이고, 실패를 예고한 헛된 시도라는 게 제삼자의 눈에는 너무 자명하게 보이는데도 말이다.

영국의 정치인이며 학자인 해럴드 라스키는 자기와 다른 견해를 배제하고 말살하는 기도의 위험성을 이렇게 말했다. "다른 의견을 고려할 필요성에서 면역된 상황에 놓이게 되면, 그로부터 반드시 중대한 오류가 발생한다. 그것은 무오류성이라는 치명적인 환상을 만들어낸다. 그런 환상에 사로잡히게 되면 자신을 평범한 인간으로 보지 않게 된다…." 그의 말에서 우리는 특별하고 비범하기를 꿈꾸는 일그러진 권력 망상의 한 파편이 블랙리스트라는 걸 유추할 수 있다. 막강한 권력을 확고하게 굳히고 나면 다른 의견을 몰아내고 무오류성에 도전하는 무모함이 생기는 셈이다. 한데 무오류라는 것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 신의 경지일 뿐이다.

다시 라스키의 말을 이어가 보자. "(자신을 평범한 인간으로 보지 않게 되면) 자신에게 복종하는 사람들을 목적으로 보지 않고 도구로 간주하게 된다……." 풀어서 말하면 이 지경이 되면, 자신에게 복종하는 사람들을 '단물이 빠지면 뱉어 버리는 껌'과 같은 물건으로 취급한다는 뜻이다. 씁쓸한 것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서 검찰과 특검 수사, 재판 과정을 통해 우리는 매일매일 이런 인간 군상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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