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주의 시선] 한류 제1호 '조선의 무희' 최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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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주의 시선] 한류 제1호 '조선의 무희' 최승희
  • 연합뉴스
  • 승인 2017.04.01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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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조각 같은 선과 경탄할 만한 손놀림의 표현, 코믹함, 그리고 위협적인 여러 가면으로 열반과 미소와 감루의 황홀함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동양의 환상을 나타내 보였다."

프랑스 일간 르피가로는 1939년 2월6일자에서 1주일 전 파리 시내 살 플레옐 극장에서 있었던 최승희의 공연을 위와 같이 평했다.

1938년 12월24일 프랑스 르아브르 항에 도착한 최승희는 파리에서 '초립동,' '보살춤,' '아리랑' 등 조선춤을 중심으로 화려한 공연을 펼쳤다. 피아노, 바이올린 반주 외에도 조선에서 악사들을 데려와 대금, 가야금, 장구 등을 직접 연주하게 했다. 이날 공연은 정원 2천546석의 공연장이 관객들로 꽉 차는 성공을 거두었다. 가장 인기를 끈 '초립동'으로 파리에서 한때 초립동 모자가 유행하기도 했다.

▲ 파리 샤이오 국립극장 공연 포스터 '조선의 유명한 무희'로 소개됐다

최승희는 파리 공연을 마치고 벨기에 브뤼셀, 프랑스 칸·마르세유, 스위스 제네바·로잔, 이탈리아 밀라노·피렌체·로마, 네덜란드 암스테르담·헤이그 등에서 무대에 올랐다. 가는 곳마다 현지 언론들은 동양 여성의 신비로운 공연에 격찬을 보냈다. 객석 3천 석의 샤이오 국립극장에서 가진 2차 파리 공연에서는 화가 파블로 피카소, 앙리 마티스, 시인 장 콕토, 작가 로맹 롤랑 등 당시 유럽의 문화예술계를 이끌던 인사들이 동양의 아름다움, 조선의 아름다움을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1938년 8월 중순 최승희는 파리에서 다시 이탈리아, 북부 독일, 스칸디나비아 등지로 60여회의 공연을 예정하고 있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유럽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마르세유 항을 출발해 일본으로 향하던 배는 전쟁으로 항로를 바꿔 파나마로 가게 됐는데 이곳에서 미국 흥행사의 주선으로 뉴욕, 시카고,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에서 공연하게 됐다. 뉴욕 공연에서는 '세계 10대 무용가의 한 사람'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또한, 중남미에서도 춤을 출 수 있었다. 브라질,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 멕시코에서 공연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온 것은 1940년 12월이었다.

동양 무용가로는 처음으로 유럽과 미주대륙을 열광시켰던 최승희. 일본 여권을 소지하고, 일본 공관의 도움으로 순회공연을 진행했으나 당시 공연 포스터, 팸플릿에 최승희는 줄곧 '일본 무희'가 아닌 '조선 무희(La Danseuse Coreenne, Korean Dancer)'로 소개됐다. 현지 언론 보도도 마찬가지였다. 최승희와, 그를 위해 문학평론가의 길을 포기하고 공연 기획을 맡아온 남편 안막의 자존심이었다.

1930년 3월31일은 최승희 개인에게, 우리 근대무용사에 뜻깊은 날이다. 최승희의 첫 창작무용 공연회가 경성시내 단성사에서 열렸다. 조선 여성의 첫 서양 창작무용 공연이었다. 15세의 나이에 무용을 배우러 일본으로 떠났을 때 가세가 빈한해 서커스단에 팔려갔다는 소문까지 돌았던 최승희로서는 금의환향의 자리였다. 당시 '최승희 양의 창작무용 공연회'라는 제목의 일간지 보도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찍이 석정막(石井漠. 이시이 바쿠) 무용연구소에서 떠나 나와 서울 고시정(古市町. 용산구 동자동)에 무용연구소를 두고 여러가지로 분투하여 오던 최승희 양은 오는 삼십일 일과 사월 초하룻날 이틀 밤 오후 일곱시부터 시내 단성사에서 개최하기로 하였다는 바 금번에는 연구소원 총출연이 있겠으며 신창 작인 '오, 야 야,' '농촌 소녀의 춤,' '밤이 밝기 전,' '운명을 탄식하는 사람' 이외에도 몇가지가 있을 터이고 특별히 본보 독자들에게는 우대권을 발행하기로 되었다 한다." (동아일보 1930년 3월31일)

최승희는 1911년 11월24일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다. 1926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경성공회당에서 일본 근대무용의 선구자 이시이 바쿠의 무용발표회를 본 것이 계기가 되어 그를 따라 도쿄로 건너가 연구생이 됐다. 힘든 수련 생활을 거쳐 3년 만에 주역급 무용수의 자리에 올랐고, 1929년 귀국하여 경성에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차렸다.

최승희는 1931년 카프(KAPF) 회원으로 와세다대학교에서 러시아문학을 공부하던 안막과 결혼했다. 1933년 3월 다시 이시이 문하로 들어간 최승희는 전통무용가 한성준으로부터 고전무용을 사사, 조선춤을 계승하고자 했다. 이듬해 도쿄청년회관에서 조선 전통무용과 현대무용을 접목한 창작무용 '에헤야 노아라'를 포함해 승무, 칼춤, 부채춤, 가면춤 등을 현대화한 작품들을 무대에 올려 시선을 끌었다. 이후 최승희는 승승장구했다. 1936년 영화 '반도의 무희'에 출연했고, 같은 해 말부터 4년에 걸쳐 미국, 유럽, 중남미 국가에서 공연했다.

그러나 유럽과 미주대륙 순회공연을 마치고 일본 요코하마항에 도착했을 때 시국은 삼엄해져 있었다. 전시체제가 형성되어 많은 문화단체가 해산됐다.

▲ 최승희의 '초립동'

최승희는 작정하고 일제에 협력했다. 귀국하고 바로 일제의 국민통합기구인 대정익찬회에 가입했다. 1941년 10월 일본 오사카회관에서 재일조선인 통제조직 협화회 회원을 위한 공연을 했다. 12월에는 일본 육군성 휼병부를 방문해 공연 수익금을 헌금했다. 1942년 2월 경성 부민관에서 조선군사보급협회에서 주최하고 조선총독부, 조선군 등이 후원하는 공연을 펼쳐 공연 수익금 전액을 협회에 내놓았다. 이어 관동군 주둔 만주로 들어가 단둥, 다롄, 선양, 푸순, 지린, 창춘, 하얼빈, 치치하얼 등을 군 트럭을 타고 순회하며 관동군 위문공연을 했다. 그는 베이징에서 해방을 맞고 1946년 5월 귀국했다. 전쟁 기간 전선 공연이 총 130여회였다.

이러한 적극적인 친일행적은 해방 후 문제가 됐고, 최승희는 1946년 7월20일 북으로 넘어갔다. 최승희는 김일성으로부터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 평양 대동강변에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세우고 연구생을 기르며 사회주의 성격의 작품들을 공연했다. 한국전쟁 후에는 전쟁을 주제로 영웅적이고 전투적인 여성들이 등장하는 작품들을 소개했다. 그는 1950년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조선무용가동맹중앙위원회 위원장, 무용학교 교장, 국립무용극장 총장 등을 역임했으며, 1952년 공훈배우, 1955년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1958년 안막이 반당종파분자 혐의로 숙청되자 최승희도 비판을 받았고 최승희 무용연구소는 폐쇄됐다. 당국이 딸 안성희에게 어머니 최승희를 비판하게 했다는 설도 있다. 무용학교 평안무가로 있다가 1959년 조선무용가동맹위원장으로 복귀했으나 1967년 숙청됐고 1969년 8월8일 58세로 사망했다. 북한에서 최승희가 복권된 것은 2003년이었다.

이미 80여 년 전 유럽 한복판에서, 미주대륙에서 조선춤의 아름다움을 알린 무용가 최승희. 한류 제1호라 칭할 만하다. 당시 일본 국적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무희'로 이름을 떨쳤다. 그는 한국 근대무용의 틀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한평생 310편 이상의 작품을 만들었고, 공연 횟수가 2천500회에 이른다. 조선춤을 정리한 저서들도 남겼다.

최승희는 조선춤을 계속 추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친일을 했다고 말했다. 자신은 이념은 모르고 춤만 춘다고 했다. 남편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월북하여 북한정권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았지만 원하지 않는 정치적 행사에도 동원됐고 창작의 자유에 목말라하기도 했다. 최승희식 예술지상주의는 '주체예술'과 맞지 않았다.

그러나 드러내놓고 요란하게 친일을 한 것도, 공산정권을 찬양하는 춤을 춘 것도 사실이다. 역사에 가정은 의미가 없다. 식민지 예술가가 아니었더라면, 북으로 가지 않았더라면, 정치와 무관했더라면 어땠을까. '붓을 꺾었으면' 어떻게 됐을까. 시대가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 탁월한 재능이 좀 더 만개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안타까운 대목이다. (글로벌코리아센터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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