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로 칼럼] 선거제 개편, 대의 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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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로 칼럼] 선거제 개편, 대의 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한다
  • 연합뉴스
  • 승인 2018.12.20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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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밥 딜런이 작사 작곡한 '괜찮아요, 엄마-단지 피 흘리고 있을 뿐이에요'(It's Alright Ma-I'm only bleeding)'의 가사 중에 "미국 대통령조차 언젠가는 벌거벗은 채 세워지게 되리라"(Even the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sometimes must have to stand naked)는 구절이 있다.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로 궁지에 몰린 1974년, 1∼2월 밥 딜런의 순회공연 때 이 노래가 불리고 이 구절이 나올 때면 청중들은 어김없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해 8월 닉슨은 미국 대통령 역사상 처음으로 사임했다.

노벨 문학상까지 받은 밥 딜런의 선견지명과 통찰력이 담긴 노랫말은 새삼 '대의(代議) 민주주의'의 위기를 생각하게 한다. 근대 대의 민주주의가 시작된 후 임기가 정해진 직책에 선출된 공직자에게 공직은 소유물이 아니다. 누구라도 그 자리에는 주어진 기간만 앉아 있어야 한다.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진 미국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대변해야 할 주권자의 뜻을 무시하거나, 위임받은 권력을 초법적으로 남용하면 직을 내려놓고 국민 앞에 벌거벗은 채 서야 한다. 대의 민주주의가 존속할 수 있는 힘은 선출직 공직자가 얼마나 민의를 대변하느냐, 민의가 반영되는 선거제가 제대로 구축돼 있느냐에 달려 있다.

▲ 여야 5당,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검토 합의 여야 5당 원내대표가 15일 오후 국회 정론관에서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검토를 합의한 것과 관련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바른미래당 김관영 원내대표,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 더불어민주당 홍영표 원내대표, 민주평화당 장병완 원내대표, 정의당 윤소하 원내대표. 2018.12.15 (사진=연합뉴스)

선거제 개편 논쟁은 국회의원을 뽑는 현행 제도가 유권자의 '표심'을 제대로 대의하는 제도이냐는 의문에서 출발하고 있다. 대의 민주주의 원리와 법치주의 정신을 훼손한 이유로 헌정사 처음으로 대통령이 탄핵당한 후 '민심 그대로'를 기치로 한 선거제 개편론이 부상한 것은 자연스럽다. 1988년 이후 30년 동안 선거제는 바뀌지 않았다. 달라진 시대정신에 부합하도록 손질할 때가 됐다.

선거제는 역사성을 반영한다. 박정희 정권은 10월 유신 이후 선거구당 지역구 의원을 2명 뽑는 중선거구제를 심었다. 1973년 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공화당은 전 지역구에서 1명씩 당선됐고, 대통령이 지명한 유정회 의원까지 합쳐 66.7%의 의석을 차지했다. '신민당 돌풍'이 불었던 1985년 12대 총선에서는 민정당이 35.2%의 득표율에 그쳤지만, 전체 의석 53.6%인 148석을 쥐었다. 신민당은 29.3% 득표율로 추격했지만 67석에 머물렀다. 중선거구제와 전국구 배분의 불합리성으로 여당이 득표율보다 많은 의석을 가져갔다.

1987년 6월 항쟁 결과 '유신 잔재' 중선거구제가 폐지됐다. 선거구에서 최다 득표자 한명을 뽑는 소선거구제로 바뀌었다. 새 제도로 치러진 1988년 13대 총선은 민정당의 과반 의석 실패로 의정 사상 첫 여소야대 국회를 탄생시켰다. 민주화 여망에 부합한 선거제 덕분이었다. 하지만 1990년 3당 합당에다 지역주의까지 심화하면서 소선거구제는 영남과 호남에서 특정 정당이 의석을 싹쓸이하는 폐해를 노출했다. 지역주의에 터 잡은 양당 대결 구도라는 정치 퇴행도 초래했다. 재임 시 "정권을 내놓는 한이 있더라도 선거제도를 고치고 싶다"고 한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은 상징적이다.

대의성에도 약점을 노출했다. 소선거구제의 '승자독식' 시스템으로 사표가 많이 생겼기 때문이다. 2016년 20대 총선 최저득표율 당선자는 31.9%를 얻고도 국회에 진출했다. 30%대 득표율 당선자는 여럿이다. 또 비례대표 의석이 47석에 불과한 데다 비례대표 투표가 지역구 투표와 연동되지 않으면서 정당득표율과 정당 의석에 괴리가 생겼다. 양대 정당을 제외한 제3 정당들은 정당득표율에 걸맞은 의석을 확보하지 못했다. 대의되지 못하는 유권자가 많으면 대의 민주주의의 뿌리가 흔들린다.

또 80∼90년대 진영 논리가 강했던 때 현 선거제는 양대 정당으로 민의를 수렴하는 제도로 기능했다. 하지만 정치 담론이 다양화되고 이해와 가치도 다원화되면서, 2개의 정당 그릇에 민의를 담는데 한계를 노출하고 있다. 비례성과 대표성을 강화하는 선거제가 부상한 이유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정당득표율에 따라 의석수를 배분하는 제도로 대의성은 보다 강화될 것이다.

그렇다고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만능 보검'은 아니다. 제도 그 자체로 대의 민주주의가 보장되지 않는다. 선거제는 각국이 다르다. 영국과 미국은 비례대표제가 아예 없다. 같은 소선거구제지만 영국은 내각제이고 미국은 대통령제다. 독일은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바탕을 둔 내각제다. 스웨덴은 349명 국회의원을 100% 정당명부 비례대표로 뽑고 개별 후보에는 투표 않는다. 저마다 선거제도를 나라의 역사와 정치문화에 맞게 발전시켜왔다.

선거제 협상에서 각 정당은 제도를 둘러싼 줄다리기에 골몰하겠지만 정치행태나 정치문화 성찰도 동반해야 한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다당제가 보장된다면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 정치도 폐기돼야 한다. 다른 가치를 존중하는 공존과 타협의 정치를 추구하지 않으면 합의 없는 혼란만 심화할 것이다. 공천 민주화를 위한 장치도 강화해야 한다. 늘어난 비례대표가 당 지도부의 공천권이나 계파 확대의 무기로 활용돼선 안 된다. '민심 그대로' 선거제를 내걸었지만, 이 또한 민심이 원하는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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