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인문학’인가?
상태바
왜 ‘인문학’인가?
  • 김춘섭 위원
  • 승인 2014.05.12 10: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김춘섭 문학박사 / 전남대학교 명예교수 / 인문학 리케움 ‘일우문사’ 대표
우리들 인간이 존재하는 공간은 어디에서 왔고 그 공간의 단초를 이루는 본질은 무엇인지, 기원전 고대 그리스의 선각자들은 우주적 자연물질의 존재에 대해 더없이 궁금해 했다. 탈레스(Thales)를 중심으로 한, 당시 소아시아 지방 도시국가의 밀레토스 학파가 그들이었다. 특히 탈레스는 세계를 구성하는 자연적 물질의 근원을 최초로 물(水)이라고 밝혔다. 또 그의 제자로도 알려진 ‘아낙시만드로스’는 세계의 근원을 이루는 단초의 존재는 불사불멸(不死不滅)의 영원히 운동하는 어떤 ‘물질’일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뒤를 이은 또다른 선각자 ‘피타고라스’는 그것에 대해 물질적인 것에 있지 않고 수(數)라고 하는 추상적 원리에 있다고 설파했다.

이 같은 사실적(史實的) 예화에서 확인되는 오랜 옛날 선대의 사유로부터 우리는 ‘인문학’ 또는 ‘인문주의’의 뿌리를 가늠해 볼 수가 있다. 인문적 발상은 무엇보다도 인간 본능의 ‘호기심’에서 작동해 왔다는 사실이다. 궁금증을 해결하고자 하는 호기심, 즉 지적 호기심이 없이는 앎의 진화, 나아가 문명의 진화는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앎을 향한 본능 충족의 욕구에 인문학적 사유나 자연과학적 탐구의 차이란 본질적으로 의미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유와 탐구의 대상이 무엇이든, 모두 사람에 대한 또 사람을 위한 면려(勉勵)일진대 과학과 철학의 경계를 긋는 문턱은 당초 없었던 것, 인문학을 ‘자연과학’과 대비시켜 굳이 ‘인문과학’이라 지칭하게 된 것은, 그런 의미에서 온당하지 않은 분류였다.

흔히 ‘리버럴 아트’ 니 ‘휴머니티스’(Humanities)니 부르는 인문학의 서구적 용어 또한 ‘인문분야’ 라기보다는 ‘인간에 관한’ 폭넓은 개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특정 분야만이 아닌 자유 선택 학문 분야를 가리킨 리버럴 아트나 이성 중심의 인본주의적 위상을 함의하고 있는 휴머니티스에 철학이니 과학이니 하는 하위분류 개념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생물학자로서 과학사의 첫 페이지에 나오는 것이나 르네상스 기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수학자이고 공학자이자 발명가였던 것, 또 계몽주의시대의 데카르트나 베이컨이 수학자 또는 과학혁명의 절대적 후원자로 남아 있는 것도 특별한 사건만은 아닐 터이다.

어느 때부터인가 우리의 세간에서는 ‘과학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가 금과옥조였는데 근자엔 ‘인문학이 살아야 과학이 산다’는 말이 유행하고 있단다. 인문학의 쓰임새가 많아졌다는 말인지 거대 첨단과학의 그늘에서 신음하고 있는 인문학에 대해 위로하는(?) 언사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인문학이 여타 다른 학문을 통섭(統攝)하는 포용성을 지닌다는 그런 의미로 해석할 수는 없을는지.

지식의 통합이라는 개념의 ‘통섭’(Consilience) 이론이 3십수년 전에 우리 학계의 화두가 되어 지금도 그 반향은 계속되고 있는 중이다. 통합학문 이론으로서, 서로 다른 것을 한 데 묶어 새로운 것을 잡는다는 통섭 이론은 오래 전(1840)에 출간된 윌리엄 휘엘의 「귀납적 과학」에서 비롯된 발상이다. 서로 다른 생각의 분야를 가로지르는 사실과 사실에 기반한 논리를 연결함으로써 지식을 통합하여 앎의 지경(地境)을 새롭게 넓혀 이해한다는 개념이다. 한 분야가 다른 분야의 생각들과 통섭해가는 일이야말로 새로운 창조의 본질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주의 본질적 질서를 인문적 사유와 논리적 성찰을 통해 이해하고자 했던 고 중세의 선각적 지식인들이야말로 참다운 통섭의 실천자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오늘의 학제 개념으로 보면, 인문학은 문학과 역사, 그리고 철학의 세 분야를 일컫는 통합개념의 용어다. 이들 인문 분야의 경계는 자연스럽게 허물어져가고 있는 요즘의 추세다. 어디 인문학뿐인가. ‘인문경영’이니 ‘감성경영’이니 하는 경영 논리의 용어도 통섭의 창조적 산물이다. 이러한 예는 인문학이 통섭의 주체로서 가장 포용적이라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대학에서 인문학의 홀대를 습관적으로 안타까워하고 심지어 개탄해 온 것은 오래전부터의 일이다. 그러나 대학 바깥에 나오면 오히려 ‘인문학타령‘이 한창이다. 가위 인문학 열풍’인 요즘이다. 대학 내에서는 물론, 각종 시민 사회단체의 시민 대상 인문학 강좌에서부터 TV 화면에서까지 인문주의가 넘쳐난다. 반가운 일이다. 인문학이 살아야 과학이 살고, 과학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고 하지 않았던가. 왜 인문학인가, 곱씹어 생각해 볼 일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