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가 세운 정착촌…70년 흘러 재개발 비위세력 먹잇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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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가 세운 정착촌…70년 흘러 재개발 비위세력 먹잇감
  • 연합뉴스 기자
  • 승인 2022.09.14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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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백화마을 잔존주택 무허가 둔갑, 분양권 나눠 가져
학동참사 수사 경찰, 장기간 추적·도서관 기록 확보

해방을 맞아 돌아온 고국이었지만 몸 누일 방 한 칸 없었다.

전재민(戰災民·전쟁으로 재난을 입은 국민)으로 불린 이들은 비가 내리면 범람하는 광주천변 모래밭에 천막을 치고 고단한 삶을 이어갔다.

해방 이듬해 광주를 방문한 백범 김구 선생은 딱한 사정을 듣고 정치후원금을 털어 이들의 거처를 마련해줬다.

백범 선생은 100가구에 달하는 전재민 모두가 화목하게 살라며 '백화(百和)마을'이라는 동네 이름도 선물했다.

70여 년이 흘러 백화마을 빈집에는 재개발사업의 바람이 밀려들었다.

사람이 떠나면서 버려진 집은 주인 잃은 분양권이 됐다. 여럿으로 쪼개진 분양권은 비위 세력의 먹잇감으로 전락했다.

해방 후 전재민 정착촌인 광주 백화마을[광주 동구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해방 후 전재민 정착촌인 광주 백화마을
[광주 동구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백범 선생이 한탄했을 사연은 지난해 사상자 17명을 낸 '광주 학동참사'의 이면을 1년 넘도록 파헤친 경찰의 수사 과정에서 드러났다.

14일 광주경찰청과 광주시에 따르면 광주 학동4구역 재개발사업 비위 세력이 분양권을 가로챈 광주시 소유 주택은 백화마을에 뿌리를 둔다.

백화마을은 현재 광주백범기념관과 동구 학2마을아파트가 자리한 터에서 태동했다.

1946년 최초 등기 당시 백화마을 내 개별 주택의 땅 주인은 대한민국, 건물 주인은 광주시였다.

정부는 1960년대 들어 백화마을이 주변부로 확장하자 전재민 주택을 매각했다. 일부는 새 주인을 만나지 못해 공유재산으로 남았다.

공유재산으로 남은 전재민 주택은 백화마을 옛터로부터 약 200m 떨어진 학동4구역 재개발 사업지에도 잔존한다.

폐가로 방치된 광주 백화마을 잔존주택[광주 동구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폐가로 방치된 광주 백화마을 잔존주택
[광주 동구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백화마을 잔존주택은 거주민이 떠나고 기억에서 사라져 이제는 옛 기록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집주인인 광주시 또한 수십 년간 백화마을 잔존주택을 잊고 지냈다.

학동4구역 재개발사업은 2017년 시행 인가를 받았다.

그때까지 광주시의 자산으로 남은 백화마을 잔존주택은 청산 절차를 거치지 않고 무허가 주택인 것처럼 꾸며졌다.

무허가 주택일지라도 재개발에 들어가면 실거주자의 지분을 인정하는 제도를 비위 세력이 악용했다.

재개발 보상이 착수되자 이곳에 오래전부터 거주한 사람을 안다며 거짓으로 증언하는 보증인이 나타났다.

백화마을 잔존주택은 건물 한 덩어리에 작은 집이 벌집처럼 다닥다닥 붙은 쪽방촌 구조였다.

여럿으로 쪼개진 분양권은 점유권을 주장하는 비위 세력에게 돌아갔다.

광주 학동참사 수사 경찰, 조합 사무실 압수수색[연합뉴스 자료사진]
광주 학동참사 수사 경찰, 조합 사무실 압수수색
[연합뉴스 자료사진]

'학동참사'로 불리는 광주 학동4구역 재개발 사업지의 철거건물 붕괴참사 배경을 수사하던 경찰은 광주시 소유인 일부 주택 지분이 일반인에게 넘어간 흐름을 포착했다.

철거 직전의 주택 사진을 확보한 경찰은 더 큰 의구심을 품었다.

건물 절반가량이 자연적으로 허물어진데다 잡목은 무성하고 쓰레기가 쌓여 거주민의 흔적조차 남지 않은 폐가였기 때문이다.

경찰은 마을과 각 주택의 내력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광주에서 마땅한 기록을 찾지 못한 경찰은 국회도서관까지 뒤졌다.

백화마을 잔존주택의 유래가 담긴 해방 후 전재민 정착지 기록은 국회도서관의 먼지 덮인 문헌에서 발견됐다.

재개발사업 비위 세력의 먹잇감으로 전락한 백범 선생의 유산이 끈질긴 수사를 통해 드러난 순간이었다.

김구 선생의 발자취와 백화마을 역사를 기록한 광주 백범기념관[연합뉴스 자료사진]
김구 선생의 발자취와 백화마을 역사를 기록한 광주 백범기념관
[연합뉴스 자료사진]

경찰에 입건된 비위 세력 가운데 분양권 나눠 먹기에 직간접 관여한 조합장과 정비사업관리업체 대표는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앞두고 있다.

광주경찰청 관계자는 "참사 발생 직후부터 '끝까지 진상을 규명하겠다'는 각오로 수사에 임했다"며 "1년 3개월간 진행한 수사 끝에 참사 이면의 진실을 밝히는 약속을 지키게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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