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 패닉바·잠기지 않는 비상구…대형참사가 남긴 유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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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 패닉바·잠기지 않는 비상구…대형참사가 남긴 유산들
  • 연합뉴스 기자
  • 승인 2022.10.31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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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희생 뒤에 안전조치 뒤따라…주목되는 이태원 참사 이후
이태원 참사, 추모의 메시지30일 오후 서울 용산구 지하철 6호선 이태원역 1번 출구 앞에 마련된 '핼러윈 인파' 압사 사고 희생자 추모 공간에 시민들이 헌화한 국화꽃과 추모 메시지가 놓여 있다. 2022.10.30 (사진=연합뉴스)
이태원 참사, 추모의 메시지
30일 오후 서울 용산구 지하철 6호선 이태원역 1번 출구 앞에 마련된 '핼러윈 인파' 압사 사고 희생자 추모 공간에 시민들이 헌화한 국화꽃과 추모 메시지가 놓여 있다. 2022.10.30 (사진=연합뉴스)

1903년 12월 30일, 미국 시카고 이로쿼이 극장에서 불이 났다. '푸른 수염의 사나이' 뮤지컬이 공연되고 있던 때였다. 마침 크리스마스 연휴와 방학을 맞아 학생과 학부모들이 극장에 많았다. 극장 전기 배선에서 발생한 불꽃으로 인한 화재는 처음에 큰 규모는 아니었다. 소방대도 신속히 출동했고, 불도 비교적 빨리 진화됐지만, 사망자는 무려 602명이나 됐다. 대부분 비상구 안쪽에서 미처 탈출하지 못한 채 밀고 밀리다가 질식해 숨졌다.

1871년 대화재의 트라우마가 남아 있던 시카고에 지어진 이 극장에는 27개나 되는 비상구가 설치돼 있었다. 화재 발생 한 달여 전 극장이 개관했을 때만 해도 당시 극장은 화재에 안전하다는 사실을 떠들썩하게 홍보했다. 하지만 화재 후 진행된 조사 결과, 상당수 비상구는 몰래 들어오는 이들을 막기 위해 잠겨 있었고, 밖에서 안으로 열리는 구조였던 문은 안에서 밖으로 탈출하려는 인파가 몰리면서 제대로 기능할 수 없었다.

시카고시는 화재 뒤 비상구 표시등 부착을 의무화했고, 비상구는 반드시 잠그지 않도록 했고, 안에서 바깥으로 여는 구조로 소방법을 바꿨다. 비상구 손잡이도 쉽게 열 수 있도록 바뀌었다.

이에 앞서 1883년 6월 16일, 영국 잉글랜드 선덜랜드의 빅토리아홀에서는 마술공연이 펼쳐졌다. '아이들을 위한 최고의 선물'이라는 이름으로 열린 이 공연의 상당수 관객은 아이들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사탕과 장난감을 나눠주는 행사에서 사고가 터졌다. 수많은 아이가 장난감을 받기 위해 몰려들면서 순식간에 아이들이 깔리기 시작했다. 3∼14세의 어린아이들 183명이 압사하는 비극적 사고가 벌어졌다.

3층에서 2층,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오려던 아이들은 좁은 계단에 설치된 문 때문에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이 문은 약 50㎝ 정도만 열리게 고정돼 있었는데, 한꺼번에 밀려드는 아이들을 감당할 수 없었다. 이 사고를 계기로 대중시설에서 최소한의 비상구를 설치하는 내용의 법안이 영국에서 통과됐다. 가로로 된 잠금장치를 미는 것만으로도 비상구를 쉽게 여는 패닉바의 발명 계기도 됐다.

1995년 6월 29일, 서울 서초동에 있던 삼풍백화점이 갑자기 붕괴했다. 종합상가 건물로 설계됐다가 백화점으로 용도 변경되며 무리한 설계변경과 구조변경, 증축이 이어졌던 삼풍백화점은 붕괴사고가 나기 수개월 전부터 균열 등 조짐을 보였지만 백화점은 응급조치로 대응했고, 사고를 막지 못했다. 502명의 사망자와 실종자 6명, 부상자 937명이라는 엄청난 인적 피해를 남겼다.

정부는 이후 전국 모든 건물에 대한 안전평가를 실시했고, 많은 건축물은 구조보강작업에 들어갔다. 이 사고를 계기로 응급구조 매뉴얼이 만들어졌고, 주요 도시에 119 중앙구조대가 설치되는 등 소방방재에도 일대 변화가 일어났다.

재난 수준의 사고 발생 뒤에는 아픔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노력이 이뤄져 왔다. 수많은 희생 뒤에 하나씩 이뤄진 '피의 안전 조처'였던 셈이다. 지난 주말 이태원 참사로 154명의 안타까운 인명이 희생됐다. 이번 사고 이후에도 여러 대책이 쏟아져 나올 것이 분명하다. 국가·사회 안전망을 전면 재점검하겠다는 여당도 있고, 사전 예방조치, 안전 관리, 초동 대처 등에 미흡함은 없었는지 꼼꼼하게 살펴보겠다는 야당도 있다.

그동안 간과해 왔던 안전상 허점을 규명하고 제도적 미비점을 시급히 정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여론만 의식해 내놓는 졸속 입법이나 대책, 제대로 된 검토 없이 한순간 눈길이나 끌려다 부작용이 더 큰 과잉 규제 역시 경계해야 할 일이다. 이태원 참사의 큰 아픔만큼 교훈과 남겨야 할 유산도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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