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체크] 과거 대형사고 발생 때 수사와 국회 국정조사 병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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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체크] 과거 대형사고 발생 때 수사와 국회 국정조사 병행했다?
  • 연합뉴스 기자
  • 승인 2022.11.09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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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감사·조사법 제정 후 10명 이상 숨진 대형참사 19건…국정조사 열린 건 2건뿐
삼풍백화점 붕괴·세월호 침몰 사고 때 모두 검·경 수사와 병행해 국정조사 이뤄져

이태원 참사의 진상 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실시를 놓고 여야가 마찰을 빚고 있다.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은 형사 처벌이 목적인 경찰 수사와 별개로 사건의 총체적 진상을 국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국정조사가 필요하다는 입장인 반면, 국민의힘은 우선 진행 중인 수사 결과를 지켜본 뒤 미진한 부분이 있을 때 국정조사를 해도 늦지 않다며 맞서고 있다.

이런 가운데 현근택 민주연구원 부원장은 지난 7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수사기관은 범죄 혐의에 대해서만 조사하는 것이고 국정조사는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전반적으로 다 살피는 것"이라며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도 국정조사랑 (검경)수사랑 투트랙으로 했다"고 말했다.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같은 날 TBS의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 "국정조사와 수사 중 어디가 먼저고 어디가 나중이라는 이야기는 제가 정치하는 23년간 처음 들어 보는 이야기다"라며 "원래 늘 같이한다"고 말했다.

정말로 과거에도 이런 대형 사고 때 검찰·경찰의 수사와 국정조사가 병행해서 진행됐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대형 참사를 두고 국회가 국정조사를 하는 일은 드물었지만, 국정조사가 이뤄진 경우엔 모두 검찰 수사가 마무리되기 전 국정조사가 개시돼 수사와 국정조사가 '투트랙'으로 진행됐다고 할 수 있다.

서해 훼리호 침몰사고 합동영결식[연합뉴스 자료사진]
서해 훼리호 침몰사고 합동영결식
[연합뉴스 자료사진]

◇ 삼풍백화점·세월호 사건 모두 여야 합의로 국정조사

먼저 검증의 범위를 정하기 위해 기점을 현재와 같은 '국정감사 및 조사에 관한 법률'(이하 국감국조법)이 제정된 1988년으로 삼았다.

국정조사는 제헌의회부터 운영돼왔으나 과거엔 관련 근거가 헌법과 국회법에 규정돼 있었다.

그러다가 13대 국회에서 국정조사에 관한 구체적 사항을 따로 법률로 정하도록 국회법이 개정되면서 국감국조법이 마련됐다.

이 법에 따르면 국정조사 절차를 개시하기 위해선 국회 재적의원 4분의 1 이상의 요구가 있어야 한다.

국정조사를 원하는 의원들이 조사요구서를 제출하면, 교섭단체 간 협의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거나 해당 상임위원회에서 조사위원회를 확정한다.

조사위(특위)는 조사계획서를 작성하고, 본회의에서 이를 승인하면 공식적으로 국정조사가 개시된다.

교섭단체 간 협의로 조사위가 구성되므로 지금까지 국정조사는 대체로 여야 합의로 실시됐다.

국감국조법이 제정된 1988년 이후 이태원 참사 이전까지 국내에서 1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하면서 사회적 파장이 컸던 대형 사고는 '성수대교 붕괴 사고', '씨랜드 청소년 수련원 화재 사고' 등 모두 19건에 달한다.

하지만 이 중 국정조사가 진행된 사례는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와 '세월호 침몰 사고' 등 2건에 불과했다.

나머지 사고의 경우 모두 정부가 사고 경위 등을 조사해 관련자들을 문책하고, 검·경이 책임자들을 수사해 단죄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표] 1988년 이후 주요 대형 사고 현황

◇ 국정조사 첫 사례는 삼풍 사고…원인 규명 성과 내고 입법으로도 이어져

1990년대 군사정권 종식 후 들어선 문민정부는 대형 사고로 얼룩지다시피 했다.

1993년에만 '부산 구포 열차 전복사고'(사망 78명), '목포공항 아시아나 항공기 추락사고'(사망 68명), '서해 훼리호 침몰사고'(사망 292명) 등 육·해·공(陸·海·空) 모두에서 대형 참사가 발생했다.

하지만 이 사고 모두 국정조사가 진행되지 않았다. 단, 10월 10일 발생한 훼리호 침몰사고는 그해 국회 국정감사에서 주요 사안으로 다뤄졌다.

사고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94년 10월 21일 오전 성수대교 교각 상판 50m가 무너져 다리를 통과 중이던 버스 1대, 봉고차 1대 등 차량 6대가 한강 물속으로 추락했다.

이 사고로 승객 32명이 숨지고 17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국회는 성수대교 붕괴 진상조사반을 꾸렸으나 국정조사까지 나아가지는 않았다.

이듬해인 1995년엔 4월 28일 '대구 상인동 가스폭발 사고'(사망 101명)와 6월 29일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사망 502명)가 연이어 터졌다.

당시 야당인 민주당이 대구 가스폭발 참사의 진상 규명을 위한 국정조사를 요구했으나 여당인 민자당이 이에 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뒤이어 삼풍백화점 붕괴라는 희대의 참사가 벌어지자 결국 여야는 이 사고에 대해 국정조사를 진행하기로 합의했다.

이렇게 꾸려진 삼풍백화점붕괴사건조사특별위원회는 조사계획서가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된 그해 7월 12일부터 8월 11일까지 31일간 활동했다.

삼풍백화점특위는 이 기간 회의를 6회 열고, 국정조사를 8회 진행했다.

그 결과 삼풍 사고가 ▲ 공사의 일관성 상실 ▲ 잦은 설계변경에 따른 부실화 ▲ 형식적 감리 등 공사 추진상의 문제점과 공무원 유착비리 등 행정관청의 감리·감독 소홀로 일어난 사고라고 규정하는 보고서를 채택했다.

또한 이후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 '산업안전보건법', '건설산업기본법' 등 재난방지 관련 법령이 제·개정되는 성과로도 이어졌다.

검찰도 사고 발생 당일 검·경 합동수사본부를 구성해 건물의 설계·시공·감리, 건물의 유지·관리, 공무원 유착 등 분야별 전담 수사에 들어갔다.

검찰은 고(故) 이준 삼풍백화점 회장과 아들인 이한상 사장, 삼풍 측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이충우 전 서초구청장 등 25명을 기소했다.

삼풍백화점 붕괴 현장[연합뉴스 자료사진]
삼풍백화점 붕괴 현장
[연합뉴스 자료사진]

◇ 세월호 국정조사는 큰 성과 못 내…여야 간 정쟁으로 파행

2000년대 이후 대형 사고 8건 중 국정조사가 이뤄진 사고는 세월호 침몰사고가 유일했다.

2014년 4월 16일 전라남도 진도군 해상에서 여객선 세월호가 전복돼 경기 안산 단원고 학생들을 포함해 299명이 숨졌다.

검찰은 사고가 발생한 다음 날인 17일부터 검경 합동수사본부를 구성해 진상 규명에 착수했다.

세월호 선사인 청해진해운 사무실을 압수수색하고 업무상 과실치사상 위반 혐의로 선장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이어 5월 15일 세월호 승무원 전원을 구속기소하고 선장 등 4명에 대해선 살인 혐의를 적용했다.

수사는 6월까지 이어져 해경, 운항 관계자 등 관련자가 추가 기소됐다. 검경 합동수사는 6월께 사실상 마무리됐다.

이와 병행해 국회에서도 국정조사가 진행됐다. 조사계획서가 5월 29일 국회 본회의에서 의결돼 '세월호 침몰사고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특별위원회'가 꾸려졌다.

세월호 국조특위는 진도 팽목항 방문으로 활동을 개시했지만 시작부터 삐걱댔다. 기관보고 일정 합의가 수차례 무산되며 이렇다 할 실적 없이 활동 기간 90일 중 4분의 1가량을 흘려보냈다.

청문회 증인 채택을 둘러싼 갈등을 비롯한 여야 간 정쟁으로 인해 파행이 거듭됐다. 결국 세월호 국조특위는 청문회 한 번 열지 못한 채 8월 30일 활동을 마쳤다. 결과보고서도 채택하지 못했다.

침몰 중인 세월호[연합뉴스 자료사진]
침몰 중인 세월호
[연합뉴스 자료사진]

다만 이런 와중에도 국조특위는 김기춘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을 비롯해 해양수산부, 해양경찰청 등 22개 기관을 조사해 정부의 초동 대응에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성과를 냈다.

하지만 청와대의 책임에 대한 규명이 불충분했다는 평가가 나오면서 이후 유가족을 중심으로 '세월호특별법' 제정 논의가 이어졌다.

세월호 사고 이후에도 4건의 대형 화재 사고가 있었으나 국정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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