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국화 옆에서
상태바
[특별기고] 국화 옆에서
  • 광주데일리뉴스
  • 승인 2022.12.24 10: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광주은행 OB개나리회 창립총회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가 저절로 읊어지듯 가을꽃의 대명사는 역시 '국화'다. 모임 장소로 가는 길가에 레스토랑 입구에 모습도 색감도 다양한 국화들이 피어 있다. 자태는 다소 소박하지만 그래서 오래 보아도 질리지 않는다.

오늘 모임에서 만날 이들도 국화를 닮았다. 오랜 시간 한 직장에서 동고동락했던 전우였고 동료였기에 소박한 모임이지만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연대감과 항상 새로운 즐거움을 선사한다. 필자가 속한 '광주은행OB개나리회'는 광주은행을 퇴직한 여성 직원들의 봉사 모임이다.

흔히 여성들은 남성들에 비해 네트워킹이 약하다는 지적이 많은 편이다. 네트워킹은 힘들 때 함께 고민을 나누거나, 공통 관심사를 공유하거나 서로의 정보를 교류하기도 하고, 넓은 사회와 전문분야에 대한 지식과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 배울 수 있는 이점이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여성들은 결혼, 출산과 육아 등으로 경력이 단절되기도 하고 네트워킹이 어려운게 현실이다.

필자가 1981년 광주은행 행원으로 입사해 약 30년 만에 유리천장이라는 틀을 깨며 지방은행 최초로 여성 임원이 되기까지, 그 오랜 시간 속에서 여성 직원들이 퇴직하고 나면 은행과 교류가 끊기고 소식도 알 수가 없는 것을 수없이 목도했다. 왜 우리 여성들은 남성 동우회처럼 퇴직하고도 왕성하게 활동하며 은행과 교류하고 선후배 간 친목도 도모하는 커뮤니티가 없을까 고민했다.

2013년 9월 퇴임하면서 후배 여직원들에게 커뮤니티를 만들어주자는 결심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광주은행이 창립되고 약 47년 만에 퇴직 여성 직원들을 찾아 나섰다. 필자는 퇴직금 중 일부(1천만 원)를 기부, 모임 만들기 비용에 충당했다. 뜻을 같이할 퇴직 동료들도 찾았다. 찾는데 생각보다 일은 순탄하지도 순조롭지도 않았다. 일단 은행에는 퇴직 직원에 대한 데이터베이스가 없었다. 개인이든 그룹이든 수소문해 일일이 찾아야 했다.

그렇게 해서 찾은 이들 간 가장 큰 난제는 '의식의 차이, 문화의 차이'였다. 조직 문화를 경험한 이들과 일찍 주부가 된 이들 사이에는 여러 가지 갈등 요인들이 숨어 있었다. 조직에서 장기간 성장한 이들은 일사불란한 조직 문화에 익숙했고, 과거 결혼하면 퇴직해야 했던 이들은 언니, 동생 하는 자유스러운 주부 문화에 익숙했다. 어떤 이는 함께하자고 요청하니 '무슨 자리를 줄 거냐'부터 물었다. '왕멘붕'이었다. 비슷한 일들이 연이어 일어났다. 순수한 내 선의를 곡해하는 사람도 많았다. 퇴직 직원 동우회는 말 그대로 친목 단체다. 노조도 아니고 NGO도 아닌데 말이다.

일을 시작할 때에는 속도도 중요하지만 방향성이 더 중요하다. 모임 창설 로드맵을 만들고 중·장·단기 전략도 마련해야 한다. 회원들 간 공감대 형성도 중요하다. 회원들 중에는 잘 모르는 선배들도 많았다. 이러한 경우 미들데스크 실무진은 회장과 회원 간 공감대 형성이 잘되도록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헤아려 이해를 구하는 등 대변 역할이 필요하다. 단계별 모든 상황을 이해시키고 의견을 조율하기에 정말 어려운 상황이었다. 여차하면 어렵게 추진해온 일을 중도에 포기해야 하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필자는 주도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야 일의 추진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광주은행 OB개나리회'는 발 벗고 나선 지 2년 반 만에 창설했다. 2015년 9월 5일 창립총회에 약 150여명이 모였다. 선후배들은 환호성을 지르고 눈물을 글썽이며 행사장은 감동의 도가니였다. 이제는 모임을 안정화시키고 성장시키는 일이 과제였다. 커뮤니티를 통해 퇴직 여성 직원들의 친목 도모와 자기성장을 바랬다. 그러기 위해서 눈앞의 이익보다는 회원 모두가 꾸준하게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함께 공유하면서 각자 봉사 마인드로 공헌할 수 있어야 한다.

되돌아보면 참 어렵고 뒤얽혀 복잡했던 시간이었다. 내년이면 벌써 8년이 된다. '뿌리 찾기'에서 시작한 우리의 커뮤니티는 선후배 간 만남의 장이자 은행과 가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이 커뮤니티 속에서 그들이 더 많이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소설가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에서 말했다. 우리를 옥죄고 있는 틀을 깨지 않으면 우리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비록 틀을 깨는 과정에 고통이 수반되지만, 성장하기 위해서는 감수해야만 한다.

이제 곧 그녀들과 함께 찻잔을 기울이며 살아가는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내려고 한다. 기꺼이 시간을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리라.

〈김해경 우먼리더십 대표·남부대 초빙교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