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싶은 길] 겨울 속 봄을 찾아 떠나는 천관산 탐방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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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 싶은 길] 겨울 속 봄을 찾아 떠나는 천관산 탐방로
  • 연합뉴스 기자
  • 승인 2023.02.10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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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암괴석 수려한 호남의 '면류관'
자연석을 쌓아 올린 것 같은 아육왕탑
자연석을 쌓아 올린 것 같은 아육왕탑

한반도는 남북으로 긴 지형이어서 위도에 따라 기온 차가 자못 크다. 마음이 움츠러드는 겨울이라도 남쪽 지방에는 봄처럼 다사로운 날이 적지 않다. 특히 서남쪽 땅은 폭설이 내리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훈풍이 분다.

◇ 천관산에서 만난 봄

새해 벽두에 찾은 전라남도 장흥의 천관산(723m)이 그러했다. 반도 남쪽 끝 '호남의 5대 명산' 천관산에서 봄을 만났다. 그전에 내린 폭설의 자취는 온데간데없었고 따뜻한 바람이 살랑대고 온화한 햇살이 대지를 내리쬐고 있었다.

봄은 우리가 기다리는 계절일 뿐 아니라, 찾으러 떠나는 대상임을 천관산은 깨닫게 했다. 함박눈을 맞으며 동심으로 돌아가는 게 겨울의 묘미지만 봄을 찾아 남국으로 떠나는 것도 겨우살이의 추억을 풍성하게 만드는 길이지 싶다.

호남 지방을 서쪽의 평야 지대와 동쪽의 산간 지역으로 나누는 산줄기인 호남정맥의 끝자락인 천관산은 남원 지리산, 영암 월출산, 정읍 내장산, 부안 내변산과 함께 호남의 5대 명산을 이룬다.

월출산 못지않은 바위산이면서도 산세가 부드럽고, 능선이 완만해 걷기에 좋다. 월출산이 우람한 바윗덩어리들로 형성된 산이라면, 천관산은 길쭉한 돌기둥들을 모아 세워놓은 듯한 기암괴석들이 천태만상을 이룬다.

멀리서 보면 바위들 모양이 천자의 면류관 같다고 해서 호남의 면류관이라고 불렸다.

돌기둥을 모아 놓은 듯한 기암괴석
돌기둥을 모아 놓은 듯한 기암괴석

◇ 호남의 면류관, 천관산

천관산에는 단일 수종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 군락인 동백숲이 있고, 정상인 연대봉 근처에는 150만㎡의 억새밭이 능선을 따라 조성돼 있다.

천관산은 능선에 오르면 사방으로 시야가 트여 광주 무등산, 월출산, 장흥 제암산 등 전남의 명산을 조망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맑은 날에는 제주도 한라산까지 뚜렷하게 보인다. 장흥과 제주도 사이 직선거리는 약 150㎞이다.

중턱에 올라서면 다도해가 삼면으로 펼쳐지는데, 능선을 걷는 내내 아기자기하면서도 장대한 다도해에 취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봄이면 동백과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고, 가을에는 은빛 억새 물결이 손짓하며, 기기묘묘한 바위들과 다도해를 감상할 수 있는 천관산은 탐방로 또한 그리 가파르지 않아 산길이면서도 여유롭게 걸을 만하다.

천관산은 정상에 오르는 코스가 많다. 그중에서 천관산문학공원에서 시작해 탑산사∼구룡봉∼환희대∼연대봉(정상)∼불영봉을 거쳐 공원으로 원점 회귀하는 코스를 탐방했다. 거리는 약 5㎞. 긴 거리는 아니었지만 이곳저곳 흥미로운 장소를 살피느라 4∼5시간 걸린 것 같다.

탑산사에서 내려다본 풍경. 맑은 날에는 한라산이 보인다.
탑산사에서 내려다본 풍경. 맑은 날에는 한라산이 보인다.

탑산사는 우리나라 최초로 불교와 부처님 진신사리가 들어온 곳으로 추정된다. 전설에 따르면 치세 중 불교 전파에 힘썼던 아소카 인도 왕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8만4천 개로 나눠 아시아 곳곳에 불탑 8만4천 개를 세워 봉안했다. 중국에 19개, 한국에 2개 탑을 세웠다.

탑산사 아육왕 탑이 그중 하나고 나머지 하나는 금강산에 있다. '아육왕'은 '아소카왕'의 한자 표기이다. 아육왕 탑은 거석이 겹쳐져 5층을 이루고 있는 거대한 돌탑이었다. 조선 시대에 탑 상층부 절반이 무너졌다. 아육왕 탑 옆에는 신라 의상대사 수행처였던 의상암지가 있었다. 아육왕 탑은 천관산의 숱한 바위 중 가장 신비로운 암봉이었다.

아육왕 탑 서쪽 정상에 있는 구룡봉에 올라서면 발아래로 펼쳐진 골짜기들이 아찔하다. 골짜기 너머로는 석선봉, 진죽봉, 환희대 등 뾰족뾰족한 기암괴석들이 연이어 펼쳐졌다. 구룡봉 정상에는 수십 개의 크고 작은 물웅덩이들이 있었다.

연대봉 정상 봉화대에서 본 전경
연대봉 정상 봉화대에서 본 전경

이곳에서 놀던 아홉 마리 용들이 바닥을 꼬리로 내리쳐 만들어진 구덩이들이라는 설화가 떠돈다. 네모나게 깎인 책 바위가 서로 겹쳐져 있어서 만권의 책이 쌓인 것 같다는 대장봉 정상에 있는 평평한 석대가 환희대이다. '이 산에 오르는 자는 누구나 이곳에서 성취감과 큰 기쁨을 맛보게 되리라'. 환희대 표지판에 쓰인 글이다. 풍광이 빼어난 명산에 오르는 이유는 이처럼 단순하지 않을까 싶다.

천관산 정상인 연대봉의 이름은 고려 시대부터 이곳에 봉화대가 설치된 데서 연유했다. 연대봉에서는 바다가 잔잔하고 수산물이 풍부하기로 유명한 득량만, 완도군의 청산도, 금당도, 고흥군의 팔영산, 거금도 등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연대봉에서는 또 정남진이 뚜렷이 내려다보였다.

정남진은 서울 광화문 사거리의 남쪽 땅끝을 말한다. 안중근 의사가 1909년 조선 식민지화를 주도한 민족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한 의거지인 중국 하얼빈(哈爾濱), 겨울 추위가 맹위를 떨치는 북한의 땅끝 중강진, 광화문, 정남진은 동경 126도 위에 일직선으로 자리 잡고 있다.

장흥에는 국내 유일의 안중근 의사 사당인 해동사가 있다. 장흥 석대들은 1894년 12월 동학농민군 3만여 명이 관군, 일본군과 최대, 최후의 격전을 벌인 장소로 재조명되고 있다. 정남진에 세워진 높이 46m의 전망대는 안중근의 기개, 동학농민군의 근대정신, 남북통일의 염원을 담고 있다.

정상에서 하산해 천관문학공원 쪽으로 내려가는 중간에 만난 불영봉은 큰 바위들이 무더기로 쌓여 봉우리를 이뤘다. 그 꼭대기에 앉은 네모꼴 바위는 부처님 같은 엄숙함을 지녔다.

사각 돌기둥 모양의 바위
사각 돌기둥 모양의 바위

◇ 현대 한국 문학의 산실, 장흥

장흥은 문학적 전통이 남다른 곳이다. 한국 현대 문학의 거장인 이청준(1939~2008), '아제아제 바라아제'를 쓴 한승원(1939~), 대하소설 '녹두장군'을 완간한 송기숙(1935~2021), 시조 시인 김제현(1939~), 아동문학가 김녹촌(1927~2012) 등을 배출했다.

한승원은 한국인 최초로 맨부커인터내셔널상을 받은 한강(1970∼)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르 클레지오가 한국 작가 중에서 노벨문학상 수상 가능성이 높은 작가로 황석영과 함께 지목한 이승우(1959~)도 장흥 출신이다. 인구 4만이 채 안 되는 장흥에서 나온 등단 문인만 100여 명에 이른다.

장흥의 문학 전통은 기행가사의 효시인 '관서별곡'을 쓴 기봉 백광홍(1522~1556), 호남 실학의 기초를 닦은 위백규(1727~1798)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관서별곡'은 정철의 '관동별곡'보다 25년 앞서 쓰였다.

장흥 사람들은 정남진 해안에서 천관산에 이르는 아름다운 자연, 삶의 현장으로서 독특한 향기와 색깔을 지닌 장흥 땅에서 이런 문학적 저력의 뿌리를 찾는다. 장흥의 범상치 않은 시간과 공간을 배경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유장한 이야기와 노래들이 지어졌다는 것이다.

문인들의 글을 새긴 자연석으로 꾸민 천관산문학공원
문인들의 글을 새긴 자연석으로 꾸민 천관산문학공원

장흥 출신 문인들의 면면을 살필 수 있는 천관문학관, 장흥 출신 문인을 포함해 한국 대표 문인 54명의 글을 자연석에 새겨 꾸민 천관산문학공원이 천관산 기슭에 있다.

공원에는 구상 시인의 '꽃자리' 시비, '큰산 꼭대기 구룡봉에서 바라본 세상은 끝없이 넓었다. 작은 동산 같은 그의 마을 뒷산 너머로 남해의 푸른 바다가 아득히 하늘로 이어져가고, 북으로는 수많은 산이 부연 연무 속으로 겹겹이 멀어져가고 있었다'라는 이청준의 '무소작씨'의 일부 구절이 새겨진 비석이 있었다.

아름다운 시어로 고향을 노래한 이대흠의 '제암산을 바라보며'의 시구는 강렬했다. '제암산을 보면 장흥땅 전체가 / 그 산으로 집중된 느낌이 든다. 과장하면 / 전라도가 한반도가 그곳으로 모아져 / 탱탱히 부풀어 오른 산'.

제암산은 봄이면 산을 붉게 수놓는 진달래 무리로 유명한 장흥의 또 다른 명산이다. 국토 전체가 고향인 남쪽 땅끝으로 집중되고 있다는 표현에서 느껴지는 강한 자의식과 자연과의 깊은 교감이 장흥 땅의 생명력을 대변하는 듯싶었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3년 2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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