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산책] 고대 동방문명과 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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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산책] 고대 동방문명과 성서
  • 김춘섭 위원
  • 승인 2014.06.20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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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춘섭 문학박사 / 전남대학교 명예교수 / 인문학 리케움 ‘일우문사’ 대표
인류가 모두 같은 시기에 역사생활과 문명창조를 시작한 것은 아니다. 신석기 문명을 일찍 끝내고 최초로 한 단계 높은 문명단계에 들어선 곳은 ‘티그리스-유프라테스’(Tigris-Euphrates) 두 강과 이집트의 나일 강 계곡이었고, 이 두 지역의 문명이 후에 서구문명의 중심이 된 것은 다 아는 일이다. 문명의 발원은 기원전 3천년경의 일이다. 여기가 바로 '고대 동방'(Ancient Orient)이라 불리는 곳이며 오늘날의 이스라엘,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 이란, 이집트 등에 해당되는 지역이다.

그러니까 고대 동방문명의 발원지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두 지역이다.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는 고대 그리스어 ‘두 강 사이의 땅’에서 유래된 말로 기원전 4세기경 헬레니즘시대이래 역사, 지리학 및 고고학 명칭으로 사용되어 왔다. 두 강은 오늘날 터키의 동부와 아르메니아 중서부에 위치한 ‘아라랏‘ (Ararat) 산기슭의 반(Van)호수에서 발원하여 터키 남부의 타우로스 산맥을 거쳐 이라크 북부를 관류해 페르시아 만으로 흐르는 티그리스 강과 역시 아라랏 산 계곡으로부터 같은 경로를 거쳐 시리아 중앙을 돌아 이라크 남부를 통해 페르시아 만으로 흐르는 유프라테스 강을 말한다. 아라랏 산은 성서의 ‘노아의 방주’ 기사에 방주가 떠내려가다 이곳에 멈추어 섰다고 기록되어 있고 그 안착지엔 방주의 모형 자국과 그 배 조각이 지금도 남아 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이들 두 강 사이의 땅에서 이루어졌지만 정확하게는 두 강이 만나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그 접점 지역의 도시들이 그 발원지였다. 오늘날엔 황량한 폐허인 채로 우르(Ur), 라가시(Lagash), 우루크(Uruk), 등 당시 화려했을 도시들의 유적만이 남아 있다. 이들 도시문명을 ‘수메르 문명’이라고도 부르는 이유는 그 문명을 일군 최초의 정착민이 수메르(Sumer)인이기 때문이다.

창세기 2~3장에 기록된 ‘인간의 창조’ 기사의 배경이 ‘에덴’인데 그 에덴으로 설정된 지역이 메소포타미아의 중북부로 추정되어 오고 있다. 에덴동산 주변이 그것을 지으신 하나님의 노여움으로 온통 물바다가 되어 “물이 일백오십일을 땅에 창일”하여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렸다”라고 기록한 ‘노아의 방주’ 이야기도 이곳 고대동방문명의 발상지 전역이 무대이다. 창세기의 기록에 의하면 노아의 방주는 아라랏 산에 머물렀으며 하나님은 방주에서 나온 아담의 10대손 노아 부부로 하여금 셈과 함과 야벳을 낳게 하여 인류가 온 땅에 퍼지게 되었다.

실제로 이스라엘 역사서이기도 한 구약성서 중후반부의 대부분은 이곳 고대 근동지역에서 흥망성쇠한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 그리고 페르시아 등 제국들과의 관련역사로 채워져 있다. 특히 남북으로 분할된 ‘분단 이스라엘’의 치열한 종교적 민족주의로 읽히는 기록들인 것이다.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에 정복당한 북이스라엘과 기원전 586년, 신 바빌로니아에 남 유다마저 멸망당함으로써 명운을 다한 이스라엘 민족, 통한의 잔혹사가 대선지자와 소선지자 16명의 ‘선지자서’로 기록되어 있다. 이스라엘 민족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고향이자 구약성서의 성지이기도 한, 이러한 고대 동방분명의 발원지 전 지역이 7세기 이후 오늘날까지 무슬림의 텃밭이 되어 그리스도교와 대립해 오고 있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집트는 열대기후의 상(上)이집트와 아열대의 하(下)이집트로 나뉘어져 인종도 기후도 서로 다른 환경이었다. 나일강변을 따라 형성된 강 양쪽의 비옥한 지대를 제외하고는 주위가 황막한 사막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외부 세력의 침입을 받지 않고 독자적인 사회 환경을 유지할 수 있었다. 나일 강은 멀리 아프리카 적도 부근의 빅토리아 호수에서 발원하여 상하 이집트를 관류, 지중해로 흘러 들어가는 6천여 킬로미터나 되는 세계 최장의 강줄기이다. 이집트 문명의 특징은 나일 계곡이 제공해주는 안정감이었다. 해마다 일정한 시기에 되풀이되는 강물의 범람은, 고대 이집트인으로 하여금 자연은 예측 가능한 것이며 자비로운 것이라고까지 생각하게 해 주었다. 이 이집트의 전체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두 가지 업적은 기원전 3100년경에 이루어 졌다. 이집트 문명의 배경이 된, 상 하 이집트의 통일과 문자의 발명이 그것이다. 이후 6왕국 31왕조로 계승된 2천 5백여년의 이집트 역사는 고대 인류문명의 중심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터이다.

구약성서 속의 이집트 관련 기록은 단연 ‘출애굽기’이다. 우리말 성경의 이 제목은 이른바 헬라어 70인 번역본 성경의 헬라어 명칭인 ‘엑소두스’(Exodus)가 원제목이다. 출발 또는 탈출의 중의적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다. 출애굽기는 이름 그대로 오랜 기간 ‘애굽’에서 갖은 어려움을 격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는 40년간의 광야 여정을 기록하고 있다. 이 40년간의 여러 광야 여정은 레위 기, 민수기, 신명기의 책명으로 담겨 있다. ‘출애굽기’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지는 유대민족 초기의 이른바 족장시대를 거쳐 가나안 정착 이후의 ‘사사(士師)시대’로 가는 중간자 역의 모세 이야기이지만 당시 고대 이집트의 선진 문명 실사를 잘 전해주는 기록이기도 하다.
예수의 신약성경 시대는 모세로부터 1천5백여 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성육신으로 이제 막 태어난 아기예수가 헤롯왕의 위해를 피해 성모의 보호로 ‘애굽’에 피난했다가 나사렛으로 귀환한 여러 복음서의 기록은 이집트 관련 기사이지만 고대 동방문명의 이집트와는 먼 시간 거리에 있는 이야기이다.

성서 속의 고대 오리엔트 문명은 역사적 사실의 기록과 기록자의 의도된 허구가 종교적 완성도를 목표로 적절히 혼재되어 있다는 주장이 이어져온다. 그러나 성서
로서의 기록을 역사적 팩트의 시각으로 왈가왈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는 일이다. 역사적 사실의 기록이 서술자 혹은 서술의 목표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듯이 성서의 기록도 또한 당연히 그러하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바이블에 기록된 역사적 팩트를 뛰어 넘는 당시의 역사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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