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산책] 인문에서 경영을 만나는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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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산책] 인문에서 경영을 만나는 까닭
  • 김춘섭 위원
  • 승인 2014.08.21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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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춘섭 문학박사 / 전남대 명예교수
수년 전에 한 중견 언론인이 쓴「인문의 숲에서 경영을 만나다」라는 얼핏 낯선 이 한권의 단행본 책이 출판되자마자 경영계의 독서 판을 뒤흔든 일이 있었다. 불과 10개 월 만에 11쇄나 거듭 되어 당시 출판계의 작은 화재꺼리가 되기도 했다. 경영계를 벗어나 일반교양물 독서층까지 널리 충족시킨 결과였을 것이다.

사실, 현대 기업 경영의 키워드가 될 인문적 사례를 꼼꼼하게 안내하고 논증한 글이었지만, 경영과 상관없이 교양적인 인생 탐구서로서도 충분히 값해내는 삶의 지침서로 삼을 만했다. 생각해보면 어차피 인문도 경영도 모두 우리 인간들을 위한 덕목이고 계책일 터이니 따로 떼어 나눌 수는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저자의 말대로 인문학의 요체는 우리에게 통찰(insight 또는 penetration)의 힘을 키워주기 때문이다. 이 ‘통찰의 힘’을 벤치마킹할 수 있는 역사적 또는 인문적 사례들이 이 책의 골격을 이룬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역사’의 현장에서 취재한 것이었는데 그중 하나는 중국 청나라의 4대 임금 강희제(康熙帝)를 통해 흥륭의 사례를, 다른 하나는 ‘로마 쇠망사’를 통해서 중첩된 쇠망의 배경을 소상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경영의 실패를 경계삼고 있다. 저자의 폭넓은 인문학적 사유의 경륜과 더불어 이를 전달하는 글쓰기 능력이 무엇보다도 탁월하게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생각의 요체와 그 폭을 단순화하고 구성해내는 문장력이 뛰어나 그 방면의 전범이 될 수도 있겠거니와 지루하지 않게 읽히는 큰 장점을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삶의 멘토가 될 만한 인물이나 상황의 키워드를 통해 ‘경영’의 통로와 만날 수 있게 안내해 준다.

흔히 인문학의 범위를 문(文)․사(史)․철(哲)이 통합된 지경으로 설명한다. 생각의 표현으로서 문학과 그 생각의 보편성으로서 철학, 그리고 문학과 철학의 실제적인 궤적으로서의 역사가 하나 되어 우리 삶을 깨우쳐 왔고 그 깨우침이 창조로 드러나, 이른바 ‘문명’을 이루어왔으니 경영의 통로인들 인문의 숲을 비켜나 있지는 않을 터이다.

기원전 고대 그리스의 ‘고전기’와 헬레니즘 시대의 인문적 담론이 비잔티움 제국으로 대표되는 신본주의의 긴 터널을 빠져나와 르네상스 시대로 재생되었을 때 인문학적 영역은 자연과학까지를 통섭했다. 고대 중세의 과학사는 곧 인문학사의 연장이었던 것이다. 과학자는 철학자였고 화가였고 문학자였던 사례들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인문주의는 인본주의이고 인본주의의 종착지는 인간이 지닌 이성의 자존감에 다름 아니다. 이 이성적 자존감이 우리들의 삶을 창조적인 모험에 도전하도록 이끌었고 위험스러워 보이는 그런 도전들이 새로운 문명을 일깨워 나왔다. 농업혁명에서 상업혁명, 다시 산업혁명으로 이어진 인간역사의 순기능은 한 마디로 인문학 정신의 창조적 진행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주요 국가정책 목표도 ‘창조경제’이고 어떤 기업의 CEO는 ‘창조경영’을 사시의 핵심으로 강조하기도 한다. 풀어서 얘기하면 창조경제나 창조경영은 모두 경영의 새로운 창조가 아니라 인문학적 정신의 창조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사실 기업 경영만이 경영이 아니라 인생 경영, 국가 경영도 경영이다. 저마다 삶의 바닥으로부터 인문학적 정신으로, 앞의 책 저자가 강조하는 ‘통찰의 힘’을 키워나가는 것, 이것이 모든 경영의 윤리이고 철학이 되어야 한다.

‘인문학의 위기’라는 위기감이 대학가를 중심으로 조성되어온 것은 어제 오늘의 얘기는 아니다. 또 우리만의 얘기도 아니다. 인문학의 고향으로 자처해온 유럽의 대학이나 모든 학문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고 자처하는 미국의 대학에서도 인문학의 위기 담론이 마치 인문학의 진리인양 심심찮게 들려 왔으니까. 하지만 위기는 항상 기회를 동반하는 것일까. 인문학이 최하 저점을 지나 무섭게 치고 올라가 인문학 르네상스 시대가 오는가도 싶을 정도로 인문학이 뜨고 있다. 그러나 ‘인문학의 위기’가 논의되면서부터 이미 위기라고 허둥대는 대학의 인문학자들이 더 위기라는 말이 오가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이 역시 위기의 전부는 아닐 터이다. 사실 인문학의 홀대나 위기는 20세기의 모더니즘 시대, 이 시대에 맞는 호모 파버(Homo faber), 그리고 호모 루덴스(Homo ludens)의 인간형 시대가 침잠하고 사유하는 인문주의를 배반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아울러 끊임없는 인문적 자아 경영이 창조적 기업경영으로 가는 길, 역시 인문의 숲을 거닐며 키워내는 ‘통찰의 힘’을 발휘해야 그 길을 찾을 수 있지 않을는지 또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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