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생활 유감(有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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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생활 유감(有感)
  • 윤정한 위원
  • 승인 2015.06.09 15: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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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정한 공학박사 전남대학교 명예교수
정년 전부터 농촌으로 귀농이나 귀촌 등을 생각 해 왔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심신(心身) 수련을 위해서였습니다. 정년 후 차일피일(此日彼日) 하다가 3년 가까이 지나버렸습니다. 망설이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만. 대체로 다음과 같은 서너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우리 가족 중에 응급환자가 발생할 경우 빠른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없을 것 같고, 또 하나는 방범문제였습니다. 그리고 이웃 주민들과의 화합문제가 고민이었고, 마지막으로는 농사를 지어보니 본의 아니게 많은 생명체를 희생시키는 것이 늘 죄스러웠습니다. 그러다가 2013년 2월에 귀농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약 30년 전에 광주에서 약 45km 떨어진 곳에 약 5ha 정도의 산을 구입해 놓았습니다. 구입한 이유는 아내의 권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중산은 있으나 우리 산이 없으니 여유 돈이 조금 있으니 산이나 사두는 것이 어쩌겠냐고 했습니다. 아내의 생각이 고마웠습니다.

아내는 어떤 분의 소개로 어느 교회 장로님을 따라 산을 보러 다녔습니다. 몇 개월에 걸친 답사에도 불구하고 성과가 없었습니다. 마음에 드는 산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금보다 비싸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돈으로 사려면 산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구매할 수가 없었습니다. 산을 보고 오면 피곤해 죽을 지경이라고 했습니다. 보다 못한 내가 따라 나섰습니다. 거의 매주 토요일마다 구산(求山)을 위해 아내, 나 그리고 교회 장로님 3명이 이산 저산을 둘러보았습니다. 나 역시 지쳐버렸는데 마을에서 약 300m떨어진 산이 있으니 마지막으로 가 보자고 해서 그 산을 방문했는데 들어가는 길은 좁았으나 산에 들어 다닐만한 길이었습니다. 철조망을 둘러 쳐 놓고 염소를 키우고 있었는데 산이 여간 깨끗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피곤하여 풀밭에 털썩 앉았는데 2-3m앞에 뽕나무에 검게 익은 오디가 달려 있는 것이 눈에 보여 힘을 다해 일어나 몇 개를 따 와 먹어보니 보통 단맛이 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피곤해서 더 이상 다닐 수가 없으니 그냥 이 산을 사버리자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구입한 산이었습니다. 나는 그 산에 조그마한 오두막 한 칸을 짓고 혼자서 광주에 왔다 갔다 하면서 살려고 했는데 아내도 따라와 살겠다고 했습니다. 하는 수 없이 귀농 형식으로 그 산에 들어가 살고 있습니다.

너무 갑자기 한 결정이어서 시행착오(試行錯誤)도 꽤 겪고 있습니다. 2-3년 동안 투자한 경비가 쏠쏠합니다. 그 비용들을 생각하면 주변의 지인들이 저에게 하는 말이 생각납니다. “그 산간까지 가서 그 고생을 하느냐?”고 하는 고언(苦言)들이 생각납니다. ‘그 비용으로 광주에서 잘 먹고 편안하게 살 일이지 그 많은 돈을 들이면서 고생을 사서 하느냐?’고 하는 고언들입니다. 우리 큰 며느리가 더 답답해합니다. 저도 가끔 이런 저런 일 하지 말고 도시에서 소일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가끔 가끔 뇌리를 스치고 지나갈 때가 있습니다. 서울에 사시는 지인도 ‘연구하고 공부하는 사람이 연구하고 공부나 하지 산촌에서 무슨 일을 하느냐?’고 핀잔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고언들과 이런 생각 이상으로 자연과 대화하기가 즐겁고 행복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러나 망설였던 마지막 이유가 늘 장애가 됩니다. 즉 다른 생명체와의 상생과 조화를 이루는 문제입니다. 도(道)란 무엇입니까? 도(道)란 균형(均衡)과 조화(調和)를 이루면서 존재(存在)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주가, 자연이, 생명체가 존재하는 것은 모두 균형(均衡)과 조화(調和)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작물을 가꾸기 위해 밭에 있는 잡초와의 대화하기와 살충제를 사용할 때 벌레들과의 대화, 그리고 천도제(薦度齊) 지내주기 등은 행복함과 미안함이 교차합니다. 잡초와 벌레들은 나에게 심하게 저항하는 놈들이 있는가 하면 나의 행위에 순순히 따라 주는 놈들도 있습니다. 저항이 심한 놈들의 아우성은 들을 만한 가치가 충분합니다.

“네가 누구고 네가 무엇인데 수천 수만 년, 아니 수억 년 동안이나 여기에서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아 온 우리를 일조일석(一朝一夕)에 자르고 캐내어 우리를 죽게 만드느냐?” 그러면 나는 “미안하다. 너희들도 생명체인데 마구잡이로 뽑아버려 미안하다. 그런데 너희들하고 나 사이에 협약을 맺어보는 것이 어떠냐?” “무슨 협약이냐?” “응, 대단히 미안한 제안인데 너희들이 밭에 나고 살지 말고 밭두렁이나 산에 나서 자라면 나는 너희들을 절대로 못살게 굴지 않을 테니 밭두렁이나 산에 가서 살면 좋겠다.” “야, 임마 너는 살고 싶은 곳에서 낳고, 갖고 싶은 성(姓)씨 받아 낳았고, 부모로 모시고 싶은 부모 골라서 이 세상에 나왔느냐?” 한다. 참 뼈아픈 고언(苦言)이다. “아이고 미안하다. 그러나 나는 너희들을 희생시키고 여기에 작물을 심어야겠다. 나도 돈 들이고 여기에 정착하려고 하는데 그냥 포기할 내가 아니다. 그러나 너희들이 다음 생에는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기도하고 천도(薦度)해 주마. 잘 가거라. 그리고 다음 생에는 너와 내가 상생(相生)하는 관계의 세상에서 만나자.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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