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년간 초근목피로 살아남은 슬픈 우리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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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년간 초근목피로 살아남은 슬픈 우리 민족
  • 조병주 기자
  • 승인 2015.07.22 12: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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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모르는 전후세대들은 일본의 만행 알아야

 

▲ 조병주 대기자


민족성이 나쁜 일본은 지금도 제국주의의 강한 근성이 남아 있어 침탈야욕이 발동해 독도가 일본땅이라고 주장하는 생트집은 세계가 잘 알고 있는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같은 원인은 우리나라는 강대국들에 비해서 국력이 약하기 때문에 항상 넘보고 있음이 사실이다. 필자가 어린나이 소학교에 입학하여 일본인 담임선생님을 만나 맨 처음에 배운 글은 소, 소나무, 가지, 다리 등 조선어를 가르치다가 2~3개월이 지나니 우리말 조선어를 전혀 못하게 했다. 조선말을 하게 되면 같은 학생끼리도 5전씩을 빼앗는 것을 가르치면서 내선일체(內鮮一體), 즉 일본사람과 조선사람은 한 몸이 되었다고 기정사실화 했다. 이런 슬픈 말을 들으면서 무궁화 꽃을 ‘눈에 피꽃’이라고 가르쳐 주었는데, 알고 보니 우리나라 국화꽃이었다.

일본은 지진이 많은 나라였기에 조선을 빼앗고 조선을 일본의 본토로 만들고자 조선인들 전부를 당시 ‘목단강’(압록강과 두만강) 너머 만주 땅으로 알리려던 시나리오가 발견되면서 전 세계가 알게 된 것이다. 이것도 부족했던지 이제는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억지 주장을 하는가 하면 또 다른 야욕이 되살아났는지 미국을 기만하는데 성공하는 것 같아 보인다.

지금 만들어진 철도, 도로, 항만 등은 전부가 과거 일본인이 한국을 침략한 후 건설한 것인데 이 모두가 한국에서 생산된 제반 곡식과 유물 등을 약탈해 가기 위해 만든 것이다. 우리 민족이 먹고 살아야 할 곡식은 홀태(탈곡기) 밑에서 일본 경찰과 헌병이 지켜본 자리에서 돈 한푼 안주고 전부를 빼앗아 갔고, 우리가 먹는 것은 탈곡기와 홀태 밑에 남은 이삭을 줍거나 매진겨나 두거리에서 나오는 것들을 털어 먹었는데, 그것마저 고자질을 하는 조선 친일파 때문에 일본의 수탈정책은 말 할 수가 없었고 따라서 일본의 폐망은 하늘이 결정한 사건이다.

한편 공출문제로 할당이 되면, 할당량을 완납하지 못하는 사람은 즉시 잡아가 주재소 유치장에 가두는 강압정책으로 우리민족은 초근목피가 아니었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었던 서글픈 눈물의 세월이었다. 야심에 가득찬 일본은 전 세계를 지배하고자 우리나라의 어린 여성들을 일본 땅 나고야에 많은 군수공장이 있으니 그 공장에 가면 많은 돈을 벌 수가 있다고 거짓말을 하여 13살에서 16살의 어린 소녀들까지 강제로 수 천 명을 끌고가 군 위안부로 혹사시켜 놓고도 우리민족을 기만하고 있는 것은 통탄할 사건이며,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는데 이젠 백발이 된 어린 처녀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 것일까.

일본에게 추궁하여 밝혀내야할 중대한 사건인데 왜 우리나라는 이 사건에 대해 벙어리가 되어 버렸는지. 이국땅에서 서러운 위안부가 되었다. 갖기 싫었지만 배가 불러 야밤에 끌려 나가 사라졌기 때문에 지금까지 조국에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라고 돌아온 할머니들은 슬픈 실화를 전했다. 그런데 정부는 왜 이 같은 사연을 덮고만 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야심찬 일본은 미국 본토를 공격하려다가 부족한 군수물자를 확보한 후에 공격하기 위해 먼저 호주를 공격한 후, 군수물자를 확보하려 했으나 계획이 빗나갔다. 일본은 1941년 12월 5일 미국 하와이를 향해서 고요한 밤에 미국 해군의 요새인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하기 위해 일본이 세계 두 번째라고 자부하는 ‘무쓰호’ 함대에 많은 폭격기를 싣고 하와이를 기습 공격했다. 이 사건으로 약 750여명의 미 해군이 죽거나 부상을 입은 사건이었다. 그후 기회를 놓칠 세라 일본은 1941년 12월 8일 밤 자정을 기해서 미국 등 전 세계를 향해 공격한 것이 세계제2차대전이다. 이 같은 전쟁은 일본과 독일, 그리고 이탈리아 등 3국 동맹국들이 전 세계를 지배하기 위한 일본의 제국주의의 근성인 것이다.

일본군은 기회를 놓칠세라 미얀마를 곧바로 공격함으로서 기히 점령하고 있었던 영국군을 몰아내는데 성공을 했다. 그리고 중국 대륙을 공격함으로서 당시 장개석의 군대는 일본군의 공격만 받으면 추풍낙엽이 되어 후퇴만 하고 있었다. 그래서 중공군을 “시나노 쇼 가이 세기”(장개석을 말함)라고 불리던 것이다. 그리고 남양군도인 싱가포르와 비율빈 등 수 많은 약소국가들을 차례로 공격을 했다.
 (2편에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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