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복통 중증 사회의 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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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복통 중증 사회의 불안
  • 연합뉴스
  • 승인 2016.07.04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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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현 연합뉴스 논설위원

동물의 왕국에서 '영역'은 전쟁과 평화의 경계다. 작은 동물에서 큰 동물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기 구역을 목숨으로 지킨다. 백수의 왕인 사자무리의 수컷이 하는 일은 사냥이 아니다. 영역의 순찰과 방어다. 곰도 마찬가지다. 배설물이나 몸냄새를 숲이나 초원에 퍼뜨리는 방식으로 영역을 표시하고 경고한다.

인간에게도 동물적 속성이 있기에 영역에 대한 집착은 본능적이다. 집(가족), 이웃, 학교, 직장, 사회 공동체, 사이버 세계 등으로 영역은 확장된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집과 일터다. 집과 일터는 인간이 사람다운 삶을 영위하고 독립과 자존을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이다.

수렵채집기의 인간에겐 사냥터, 농업 혁명 이후에는 토지가 필요했다. 현대에 와서는 산업혁명과 인구과밀로 인간의 핵심 영역이 주택과 직장으로 축소됐다. 이에따라 주택 소재지와 가격, 직업이 새로운 신분 질서를 만들었다. 고급 주택이나 선망의 일자리와 함께 비싼 차량, 명품 가방과 의류, 고가 액세서리와 향수는 특권층이 뿜어대는 자기 영역 표시다. 우리나라의 경우 특히 아파트가 상징하는 부동산에 대한 국민의 집착은 유별나다.

선진국인 영국의 수도 런던에서 3만 명이 템스 강과 주변 운하를 돌아다니는 배 위에서 생활한다는 소식은 충격적이다. 이들은 신(新) 보트피플이라고 하는데 비싼 주택 가격과 월세 때문에 보금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선상에서 살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멀쩡한 직장인이다. 브렉시트 반대 진영에 섰다가 테러로 목숨을 잃은 조 콕스 하원의원도 지역구에서 올라와 런던에서 의정활동을 할 때는 선상에서 생활했다고 하니 살인적 집값을 짐작할 만하다.

집세가 너무 비싸 수많은 시민이 강과 운하를 전전하며 배 위에서 생활한다는 건 정상이 아니다. 국민이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결정한 건 이유가 있다.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와 개방, 세계화가 승자독식만 가져왔을 뿐 서민의 삶을 개선하지 못한 데 대한 분노의 표출이다. 여기에 선동적 정치가들이 기름을 끼얹었다.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다. 세계에서 유례없는 아파트공화국인 대한민국의 현실이기도 하다. 아직 한강 보트피플 얘기는 듣지 못했으나 멀지 않았을지 모른다. 서울의 아파트 평균가격은 5억 원에 육박하고, 상위 20% 아파트의 평균가격은 10억 원이 넘는다. 젊은 직장인이 금수저가 아닌 한 저축으로는 서울에서 아파트 한 칸 장만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서울의 어느 지역 아파트는 평당 5천만 원을 넘었다. 그 동네는 특별한 사람들의 영역이니 서민이나 젊은이들은 언감생심 눈도 돌리지 말라고 얘기할 수는 없다. 얼마 전 만난 전직 경제부총리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죄는 '복통 유발죄'요 그다음이 '기대 배반죄'라고 했다.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이다.

특정 지역의 아파트 가격 광란은 그 동네 잔치에서 그치는 게 아니다. 돈다발 파티에서 소외된 대다수 국민의 집단 복통을 유발한다는 게 문제다. 이는 민심이라는 용의 가슴에 거꾸로 돋은 비늘을 건드리는 것처럼 위험하다. 여기에 진경준 검사장의 주식 대박, 홍만표ㆍ최유정의 법조비리, 국회의원의 갑질, 재벌가의 추문 등이 더해졌다. 갈수록 벌어지는 빈부 격차, 경제는 성장한다는데 내 수입은 늘지 않는 데 대한 답답함, 쪼그라드는 일자리에 대한 불만 등으로 국민 복통은 중증 질환으로 깊어졌다.

역대 정부는 경제 위기가 닥칠 때마다 민생을 살피겠다며 돈을 푸는 부양책을 썼다. 결과는 국민 삶의 질을 높이지 못하고 땅값 집값만 올려놓기 일쑤였다. 그걸 성장이라고 했다. 곰이 새끼를 낳으려면 굴이 필요하고, 오리도 둥지가 있어야 알을 품을 수 있다. 젊은 청춘들에 거주 공간이나 일자리라는 최소한의 영역도 마련해주지 못하는 세상을 만들어 놓고 희망을 얘기하고 결혼과 출산을 독려하는 건 염치없다. 동물이 영역을 잃으면 멸종한다. 젊은이들이 터전 없이 방황하는 국가의 미래는 보지 않아도 뻔하다.

'기대 배반죄'도 간단치 않다. 정부나 정치권은 정책이나 공약을 내놓을 때 조심해야 한다. 금방 국민을 행복하게 해줄 것처럼 요란을 떨다가 실패하면 후폭풍을 감당하기 어렵다. 영남권 신공항 공약은 그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국민 복통 유발과 기대 배반은 둘 다 정책 혹은 정치의 실패 탓이다. 이들 죄는 법전에 없으므로 더욱 무겁다. 법정이 아닌 국민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자본주의 경쟁 사회에서 국민 복통의 원인을 근원적으로 없애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따라서 국민의 복통이 치유 불능으로 악화하지 않도록 관리하고, 기대를 최대한 충족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려면 복통을 일으킬 수 있는 원인을 줄이고, 실천 가능한 공약을 해야 한다. 현명한 정부라면 배부른 10%를 투기와 방종이 아닌 건설적인 경제활동으로 유도해야 한다. 배 아픈 90%는 진정성 있게 어루만져야 한다. 몇 년이면 거짓으로 들통날 새로운 정책을 짜내느라 고심할 게 아니라 이미 발표한 정책이라도 야무지게 마무리하는 것이 정권의 안녕에 특효라는 걸 깨달아야 한다. 국리민복이 멀리 있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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