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낯이 어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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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낯이 어때서
  • 연합뉴스
  • 승인 2016.08.04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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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메르세데스 벤츠 패션 위크' 행사에서 화려한 얼굴 화장을 선보이고 있는 모델

'길 막고 영어시험·우편함에 개똥…영국의 인종차별 민낯', '은폐, 허위보고, 묵살, 거짓해명의 연속…부산경찰의 민낯', '고립된 섬 불안한 여교사들…섬 성폭행 부끄러운 민낯', '전관로비·거액수임료…법조계 민낯 드러낸 정운호-변호사 공방'

최근 몇 달간 보도된 일부 언론 기사들의 제목이다. 하나같이 '민낯'이라는 말을 '부끄럽고 잘못된 본래의 모습'이라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굳이 비슷한 말을 찾자면 '치부(恥部)' 정도를 들 수 있겠다. 그러나 이는 사전적인 뜻과는 거리가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은 '민낯'에 대해 단순하게 '화장을 하지 않은 얼굴'이라고 기술할 뿐이다.

기사 데이터베이스를 찾아보면 201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민낯'이라는 말은 거의 사전적인 뜻으로만 쓰였고 사용 빈도도 높지 않았다. 비유적으로 쓰인다 해도 '있는 그대로 모습'이라는 뜻이었지 부정적인 뉘앙스를 담은 경우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위에서 예를 든 것과 같은 부정적인 비유는 2012~2013년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민낯'이 '숨겨야 할 부끄러운 얼굴'이라면 '떳떳이 남에게 드러낼 수 있는 얼굴'은 어떤 얼굴일까. '민낯'의 반대, 즉 '화장한 얼굴'이어야 비유의 대칭이 맞는다. 화장 안 한 얼굴이 이토록 부끄러운 존재가 돼 버린 것은 여성에게 화장이 당연시되는 풍조와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어느덧 한국에서 성인 여성은 외출할 때는 으레 화장을 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게 됐다.

화장하는 연령은 점점 어려져 이제 중·고교생이라면 화장을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다. 상당수 중·고교는 여학생의 화장을 금지하는 교칙이 있지만, 워낙 화장하는 학생이 많아 '꼴불견'일 정도로 진한 화장이 아니면 묵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지난해 초록어린이재단이 초등학교 4~6학년 여학생 123명을 조사한 결과 절반 가까운 55명(45%)이 "화장한 적이 있다"고 대답했다. 식품의약품 안전처는 '제대로 된 화장품 사용법'을 소개한다는 취지로 '소중한 내 피부를 위한 똑똑한 화장품 사용법'이라는 책자를 전국 초·중·고등학교에 배포해 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

▲ 화장품 매장에 진열된 화장품들. 사진=연합뉴스

이처럼 거의 전 연령대에 걸쳐 화장은 보편화하고 있지만, 문제는 부작용이다. 5만 년 전 네안데르탈인 유적에서 화장품 용기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조개껍데기가 발견됐을 정도로 화장의 역사는 유구하다. 과거에는 수은이나 납, 비소와 같은 독성 물질을 원료로 만든 화장품이 많아 이를 사용한 여인들이 심각한 피부질환을 앓거나 심지어 목숨을 잃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초상화에 남아 있는 영국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창백한 얼굴은 납 성분이 들어간 '베니스분'을 두껍게 바른 덕분이었다. 그 때문에 엘리자베스 여왕은 망가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 더 진하게 화장을 해야 했고 말년에는 납중독으로 인해 피부가 거무죽죽해지고 치아까지 상한 데다 신경증의 징후까지 보인 것으로 알려진다.

안전 규제가 엄격해진 요즘에는 유해 물질이 포함된 화장품으로 인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여전히 다수의 화장품에는 각종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성분이 포함돼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특히 피부가 연약하고 피지의 분비가 활발한 어린이와 청소년은 화장품 사용을 자제하는 것이 좋다고 충고하고 있다.

성인 여성의 경우에도 원래의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의 진한 화장은 피부 건강은 차치하고라도 보기에도 부담되는 측면이 있다. '민낯'을 장려하는 차원에서라도 이 말을 부정적인 뜻으로 사용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민낯'을 드러내는 것은 부끄러운 일도 아니고 잘못된 일도 아니다.

추왕훈 연합뉴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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