짠내 나는 누아르 소설…김언수 신작 '뜨거운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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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내 나는 누아르 소설…김언수 신작 '뜨거운 피'
  • 연합뉴스
  • 승인 2016.08.26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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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가상 항구 '구암' 배경으로 건달들의 치열한 생존기 그려

한국에서 인기를 끈 누아르 장르 영화 중에는 조폭(조직폭력배) 영화가 많다. 위험하고 아슬아슬하며 내일 없이 오늘 하루에 전부를 거는 조폭들의 이야기는 강렬하게 관객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한국문학에서는 그동안 조폭, 건달의 세계를 본격적으로 다룬 작품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인간의 내면에 집중하는 이야기와 단편소설 위주로 발표되는 한국문학의 큰 조류에서 작가들이 별 관심을 두지 않는 소재였다. 최근 출간된 김언수 작가의 신작 장편소설 '뜨거운 피'(문학동네)는 그런 의미에서 더 특별한 작품이다.

이 소설은 1993년 부산의 어느 항구 지역을 배경으로 각자 밥그릇을 지키고 살아남기 위해 아귀다툼을 하는 건달들의 이야기를 그렸다. 이야기의 무대는 작가가 가상으로 꾸며낸 '구암'이라는 작은 항구 동네다. 작가는 이 별 볼 일 없이 구질구질하고 작은 동네를 배경으로 서로 먹고살겠다고 악다구니를 쓰는 인간들의 천태만상을 응축해서 보여준다.

이 동네 건달은 우리가 영화에서 흔히 보는 '멋과 의리에 죽고 사는' 건달과는 사뭇 다르다. 생존과 생계를 위한 배신, 음모, 협잡이 난무하는 가운데 강자에게 엎드리고 약자를 괴롭히며 비열하고 비루하게 살아간다. "구암의 건달들은 아무도 양복을 입지 않는다"라는 소설의 첫 문장은 이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이 동네를 주무르는 우두머리 '송영감'의 입에서 나오는 얘기는 건달의 비루한 실존을 보여주며 이 소설에 현실성을 부여한다.

"나라가 어려우면 국민들 중에 제일로 힘든 게 우리 건달들이지. 암, 그거야 두말하면 잔소리고. 그런 맥락에서 지난 오십 년이 우리 건달들에겐 참 힘겨운 시절이었지. 어디 뒤숭숭한 일들이 좀 많았나. 식민지에, 전쟁에, 쿠데타에. (…) 나라가 뒤집어지고 정권이 바뀌면 이건 뭐 건달들은 동네북에다 홍어좆인 기라. (…) 내가 왜정 때부터 죽 지켜보니까, 아, 감옥에 일등으로 잡혀가는 놈들은 죄다 양복쟁이 건달이더라고. (…) 건달이 폼나면 뭘 할거며 유명해져서 이름을 날리면 또 뭐할 거고? 건달이 양복 입고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나고 나면 갈 데라곤 감옥밖에 없는 기라." (본문 11∼12쪽)

"얇은 살얼음 위를 걷듯이 항상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는 신조로 오십 년 동안 구암에서 1인자로 살아남은 송영감은 바닷가의 '만리장 호텔'을 근거지로 지역 상인들에게 상납받으며 살아간다. 중국산 고춧가루에 한국산을 조금 섞어 국산으로 둔갑시키는 치졸한 일도 한다. 권투선수 출신에 눈치 빠르고 모든 일을 깔끔하게 처리하는 '희수'는 만리장 호텔 지배인으로 송영감의 수족 역할을 하고 있다.

이제 막 40대에 들어선 희수는 지난 20여년간 건달 생활에서 남은 것이라곤 하나 없이 만리장 호텔에서 '달방' 생활을 하는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게 느껴진다. 사람을 죽이고 공무원·경찰에게 뇌물을 먹이는 온갖 궂은일을 다 시키면서도 푼돈만 쥐여주는 송영감이 점점 더 얄미워진다. 희수에게 말로는 '아들처럼 생각한다'면서도 정작 모든 재산을 물려줄 사람은 송영감의 유일한 혈육인 '도다리'라는 생각이 들면 더 암울하다. 게다가 심심풀이로 드나든 도박장에서 수억 원 빚을 지고 잔인한 사채업자 '홍사채'의 압박까지 받자 더 심란하다. 그러던 중 선배 건달인 '양동'에게서 유망한 성인오락실 사업에 뛰어들자는 제안을 받고 귀가 솔깃해진다.

희수는 새 삶을 살아보겠다는 마음으로 오랫동안 품어온 첫사랑 '인숙'과 결혼하고 송영감 그늘을 벗어나 성인오락실 사업을 시작한다. 그러나 돈은 쉽게 벌리지 않고, 사업 영역을 침범했다는 이유로 경쟁 조직들로부터 위협만 받게 된다. 또 그 뒤에는 구암을 장악하려는 상대 조직의 더 큰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

소설은 600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지만, 한 번 책을 잡으면 손에서 놓기 어렵다. 다양한 인물의 개성이 살아 숨쉬는 농밀한 이야기는 독자를 힘있게 빨아들인다. 구암 바닷가 풍경에 대한 묘사는 여름 바람의 뜨거움과 바다의 짠 냄새가 그대로 느껴질 정도로 생생하다. 전작 '설계자들'에 이어 작가 김언수를 이 시대 걸출한 이야기꾼 중 하나로 꼽게 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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