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몇 푼으로 위험을 떠넘기는 기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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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몇 푼으로 위험을 떠넘기는 기업들
  • 연합뉴스
  • 승인 2016.09.10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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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6월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 스크린도어에 스크린도어 수리 중 열차에 치여 숨진 김모(19)군을 추모하는 포스트잇이 빼곡하다. 한 시민이 추모글을 읽으며 눈물을 훔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홀로 스크린도어 정비를 하던 19세 청년 김모 군이 열차에 치여 숨진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 사고. 지하 작업장의 LP가스 폭발로 4명이 숨지고 10명이 다친 경기도 남양주시 지하철 공사장 사고. 배관 해체 작업 중 쏟아진 황산을 뒤집어쓴 근로자 2명이 숨지고 4명이 부상한 울산시 고려아연 사고.

이들 사고의 공통점은 희생자들이 대기업 정규직이 아니라 하청업체 또는 외주업체 소속 근로자라는 점이다. 근로자들 사이에서도 양극화가 나날이 심해지는 추세 속에서 '돈 없고 빽없는' 하청·외주업체의 비정규직 근로자들이 산업재해의 주된 피해자가 되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문진국 새누리당 의원이 고용노동부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 5년간 발생한 중대재해 209건의 사망자 245명 가운데 212명(86.5%), 부상자 76명 가운데 65명(85.5%)이 하청노동자였다.

산재사고에서 하청업체 근로자들의 희생이 많은 이유는 무엇보다 대기업들, 특히 건설업체들이 비용절감 등을 위해 일정한 일감을 도급에 맡기는 경우가 많고 위험이 수반되는 작업에도 예외가 없기 때문이다. 원청업체는 최대한 싼값에 도급을 맡기고 수급 업체는 때로는 터무니없기까지 한 낮은 가격으로 작업을 수행하면서도 이익을 남기려 하다 보니 안전은 뒷전이 될 수밖에 없다. 대기업으로서는 위험한 작업을 수급 업체에 맡기면 법적, 행정적 규제를 피해갈 수 있고 사고가 발생했을 경우 책임을 떠넘길 수 있다는 이점도 있다. 이 때문에 이른바 '위험의 외주화'는 매력적인 경영합리화 방안이 된다.

그러나 위험한 작업을 하청에 맡기는 것은 개별 기업에는 원가절감과 이익 극대화, 사고책임 회피의 수단이 될지 모르지만,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산업재해의 발생빈도 증가와 이에 따른 비용의 증대라는 더 큰 대가를 수반하게 된다. 그러지 않아도 여러 측면에서 처우가 열악한 하청·외주업체의 비정규직 근로자들이 대기업 정규직의 기준으로 보면 몇 푼 되지도 않는 임금을 받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도록 하는 것은 인도적인 차원에서도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다.

물론 현행 법체계에서도 위험한 작업의 도급에 규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산업안전보건법은 '안전·보건상 유해하거나 위험한 작업 중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작업은 고용노동부 장관의 인가를 받지 않으면 그 작업만을 분리하여 도급을 줄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 파견근로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은 산업안전보건법에서 정한 유해하거나 위험한 작업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절대로 파견근로자를 쓰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유해·위험 작업만을 분리하지 않고 다른 작업과 묶어 도급을 주는 방법으로 규제를 피해 나갈 수 있다. 유해·위험 작업의 도급 금지 규정을 위반해 적발됐을 경우에는 최고 5년 징역형에 처할 수도 있으나 실형이 선고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지난 5년간 하청노동자가 사망한 사건에서 원청업체 관계자가 징역형의 처벌을 받은 것은 단 1건이었다. 나머지는 집행유예 8건, 불기소·기소유예 43건, 벌금형 106건, 혐의없음 38건 등으로 '솜방망이 처벌'에 불과했다.

▲ 6월 1일 폭발사고로 4명이 숨지고 10명이 다친 경기도 남양주시 지하철 공사 현장. 사진=연합뉴스

이 같은 문제점을 인식하고 제20대 국회 개회 후 다수의 국회의원이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을 잇달아 발의했다. 개정안들은 유해·위험 작업의 경우 분리 여부를 따지지 않고 인가를 받아야만 도급을 줄 수 있도록 하고 원청업체의 모든 작업장에서 작업하는 하청업체 근로자에 대해 원청업체가 산업재해 예방조치를 강구하도록 의무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 위반에 대한 처벌도 대폭 강화했는데, 일부 개정안의 경우 도급사업 시 안전보건 조치를 하지 않아 하청업체 근로자가 사망한 경우 원청업체에 대해 연매출액의 5%까지 벌금을 병과할 수 있도록 하는 규정을 담았다.

정부도 '위험의 외주화' 문제가 심각하다는 데는 인식을 같이하고 있으며 자체적으로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을 제출한 상태다. 따라서 이번 정기국회에서 유해·위험 작업의 도급 규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법률이 개정될 가능성은 어느 때보다 커 보인다. 법규의 개정도 필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기업들의 인식이다. 근로자의 안전과 생명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와 그에 따른 책임을 돈 몇 푼에 사고팔 수는 없다는 인식을 해야 한다. 원청업체건 하청업체건 모두가 말이다. <추왕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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