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석의 동행> 대통령의 중대한 법 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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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석의 동행> 대통령의 중대한 법 위반
  • 연합뉴스
  • 승인 2016.11.17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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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광화문광장서 나부끼는 '탄핵' 깃발

2004년 5월 14일 오전 10시 헌법재판소 대심판정. 윤영철 헌재소장은 단호한 목소리로 결정문을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약 25분간의 결정문 낭독 말미에서 "이 사건을 기각한다"고 최종 주문을 읽었다. 헌정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에서 헌재가 노무현 대통령을 파면해달라는 국회의 청구를 기각한 순간이다.

대통령 탄핵안은 그해 3월 9일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이 공동으로 발의했고 3일 후인 12일 본회의에서 가결됐다. 당시 본회의장에서 농성하던 여당인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박관용 국회의장의 질서유지권 발동으로 국회 경위에 끌려나갔고 이어 실시된 표결에서 재적 의원 271명 중 195명이 참여해 193명이 찬성했다.

탄핵안이 통과된 후 전국적으로 탄핵 반대 촛불시위가 잇따랐고, 그 여파로 4월 15일 치러진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152석으로 압승했고 제1당이던 한나라당은 121석에 그쳤다. 이런 총선 민심이 반영됐던 것일까. 헌재가 탄핵안 국회 통과 후 63일 만에 기각 결정을 내림으로써 대통령의 권한정지 상태는 자동으로 해소됐고 탄핵사태는 끝났다.

대한민국은 12년 만에 또다시 이런 상황을 목전에 두고 있다. 최순실 사태가 탄핵정국으로 흘러갈 조짐이 갈수록 뚜렷해진다. 서울 광화문광장의 '100만 촛불'이나 야권이 요구한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나 '질서있는 퇴진'은 물 건너간 듯하다. 청와대는 박 대통령이 스스로 임기를 단축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야 3당과 시민세력이 연합해 대통령 퇴진운동을 계속한다고 했으나 박 대통령이 꿈쩍하지 않으면 현실적으로 별도리가 없다. 김종필 전 총리가 했다는 '5천만 국민이 달려들어도 하야 안 할 것'이라는 말이 정곡을 찌른 셈이다.

야권의 유력 대권 주자인 문재인 전 민주당 대표는 15일 박 대통령 퇴진운동에 동참하겠다면서 "지금은 탄핵을 논의할 단계가 아니다"라고 밝혔다. '지금'은 시민의 분노가 살아있는 만큼 퇴진운동에 필요한 동력이 충분하다고 봤을 것이다. 당장 탄핵을 추진하는데 '허들'도 많다. 대강 이런 이유다. ①국회 탄핵소추안 가결에 재적 의원 3분의 2인 200명이 필요한데 무소속까지 포함해 야권 의원 171명에다 새누리당 의원 최소한 29명을 끌어와야 하는 점, ②보수 성향이 강한 것으로 알려진 헌재에서 인용 결정을 내리려면 재판관 9명 중 6명이 필요한 점, ③탄핵소추안 가결로 대통령의 권한이 정지되면 황교안 현 총리가 헌재 결정 때까지 대통령 권한대행을 한다는 점 등이다. 탄핵이 국회의 문을 넘었다 해도 헌재에서 좌절될 경우 박 대통령에게 '면죄부'를 주는 결과가 된다.

그동안 잔뜩 몸을 낮췄던 친박(친박근혜)계도 공개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최경환 의원이 16일 "지금 대다수 국민 여론은 헌정 중단을 막아야 하고, 혼란을 수습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한 게 신호탄이다. 박 대통령과 친박세력은 정국 혼란이 계속돼도 상관없으니 '현상유지 전략'으로 시간을 벌어보자는 속셈이라는 분석이 설득력이 있다. 야권이 탄핵을 추진해 시간이 흘러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보수 대 진보 대결 구도가 잡히고 그러면 지지층이 재결집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결국에는 시기가 문제지 야권은 헌법과 법률에 따른 탄핵심판을 추진해야 할 것이다. 다시 2004년 헌재 결정문으로 돌아가 보자. 헌재는 당시 노 대통령이 일부 헌법과 법률을 위반한 사실은 인정되지만 대통령을 파면할 만큼 중대한 위반은 아니다는 이유로 기각 결정을 내렸다. 그러면서 '중대한 위반'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해석을 달았다. 헌재가 오늘의 최순실 사태를 예견이라도 했던가 싶다.

헌재 홈페이지에 공개된 당시 결정문을 보면 "'대통령을 파면할 정도로 중대한 법 위반이 어떠한 것인지'에 관하여 일반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나, 대통령의 직을 유지하는 것이 더 이상 헌법수호의 관점에서 용납될 수 없거나 대통령이 국민의 신임을 배신하여 국정을 담당할 자격을 상실한 경우에 한하여, 대통령에 대한 파면 결정은 정당화되는 것"이라고 했다.

최순실 사태에서 박 대통령은 '국민의 신임을 배신하여 국정을 담당할 자격을 상실한 경우'에 해당하는가. 이 문제에서 지금은 '촛불민심'과 청와대 인식 사이에 상당한 괴리가 있다. 우리는 진실에 한 걸음씩 다가가야 한다. 앞으로 검찰과 특별검사 수사를 통해 실체적 진실이 더 명확히 밝혀지면 국회, 헌재, 그리고 모든 국민의 판단도 분명해질 것이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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