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끝 약자들> '일감 줄고 돈 떼이고' 인력대기소의 긴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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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끝 약자들> '일감 줄고 돈 떼이고' 인력대기소의 긴 겨울
  • 연합뉴스
  • 승인 2016.12.28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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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불황' 새벽밥 지어 먹고 나와도 절반은 일거리 못 찾아
막노동 임금 외상으로 미루고 잠적하는 건설업자들도 많아
▲ 광주 서구의 한 근로자대기소

"오늘도 날씨 땜시 오지 말라고 연락 왔소."

여민 옷깃을 파고드는 바람과 이틀째 흩날리는 빗방울에 수은주가 뚝 떨어진 지난 23일 오전 6시께.

광주 서구의 지하철역 인근 근로자대기소에 배불뚝이 가방을 멘 A(74)씨가 한숨을 내뱉으며 들어섰다.

A씨는 2주 전 이곳에서 일당 10만원에 올겨울 내내 일할 수 있는 전남 곡성의 공사현장을 소개받았다.

그는 어김없이 새벽밥을 차려 먹고 나섰다가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나오지 말라'는 전화를 받았다.

20만원 남짓한 기초노령연금이 한 달 고정 수입의 전부인 A씨는 홀로 손자를 돌봐야 하는 처지에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A씨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근로자대기소로 발걸음을 돌렸지만, 인부 중 가장 많은 나이가 마음에 걸렸다.

꾸준히 출근 도장을 찍는 사람과 쭈뼛쭈뼛 디미는 낯선 얼굴, 구직자와 실직자, 20대 초반에서 70대 중반까지 다양한 인간 군상이 이 시간이면 대기소로 모여들었다.

걸쭉한 설탕커피를 훌훌 불어 마신 A씨는 크리스마스를 고대하는 어린 손자가 생각났는지 표정이 씁쓸하기만 하다.

이날 근로자대기소에 마련된 일감은 인테리어공사장 심부름꾼과 근처 슈퍼마켓 대체인력 등 10여 개에 불과했다.

마땅한 일거리가 없는 겨울철인 데다 한파가 불어닥친 지역경제 탓에 인부를 찾는 전화벨은 대기소로 모여드는 인력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다.

"절반은 그냥 돌아가. 새벽 일찍 나와서 얼마나 허무하겠어. 일 하나씩 챙겨주고 싶은데 미안하지."

대기소 소장은 벽면을 따라 의자에 걸터앉은 A씨 등에게 종이컵에 탄 커피를 권하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오전 6시 30분을 넘어서니 인부를 태우러 온 차량이 차례로 도착했다.

기자가 떠날 때까지 A씨는 빈 종이컵을 손에 쥐고 하릴없이 아침 뉴스를 시청했다.

비슷한 시각 지하철로 한 정거장 떨어진 근로자대기소 앞에서는 30∼40대로 보이는 남성 네 명이 나란히 쪼그리고 앉아 담배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정규직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이들은 온갖 일을 해봤다며 뼈마디 굵은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아파트 건설현장이나 하남공단 중소기업 등 '큰손'의 수요가 사라진 지 오래라는 대기소에는 전기난로 주변에만 온기가 맴돌았다.

▲ 이른 아침 근로자대기소에 들어서는 인부

투명한 비닐과 분홍색 보자기로 싸맨 데스크톱컴퓨터 부속물 옆에는 날짜와 전화번호 5개가 적힌 낡은 노트가 펼쳐져 있었다.

대기소 소장 손모(66)씨는 '도착한 순서대로 일감을 배분하느냐'는 질문에 "사람에 따라 맞는 일을 지정해준다"고 답했다.

손씨는 "험한 막노동은 반나절도 못 버텨내든지, 차분하고 꼼꼼한 일 처리는 기대하기 어렵든지 다들 제각각"이라며 "아무래도 꾸준히 눈도장 찍으며 성실함을 입증한 사람에게 먼저 일이 간다"고 덧붙였다.

그는 "일거리를 못 주는 경우도 많지만 임금을 떼였을 때 이들에게 느끼는 미안함이 18년째 근로자대기소를 운영하며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이라고 말했다.

대기소는 일당 10만∼13만원짜리 일자리를 근로자에게 소개하고, 일당의 10%에 해당하는 수수료를 사용자로부터 따로 받는다.

손씨 등 대기소 소장들은 통상 오전 7시 30분께 근로자들이 뿔뿔이 흩어지면 대기소를 잠시 닫는다.

이들이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저녁 무렵에 다시 문을 열고 사용자에게 미리 받은 임금을 나눠준다.

외상으로 소개한 일은 소장이 사비를 털어 일당을 주는데, 약속한 날짜를 차일피일 미루다가 돌연 전화기를 끄고 잠적하는 건설업자가 부지기수다.

손씨는 대기소를 운영하며 5천만원에 이르는 임금을 떼였다.

떼인 돈 단위가 건당 수십∼수백만 원 수준이라서 노동청이나 경찰에 신고해도 청산 없이 벌금 처분으로 끝나는 경우가 허다했다.

어렵게 연락이 닿은 사용자들은 '다단계 하도급을 거치느라 나도 손해를 봤다'며 읍소하기 일쑤였다.

고용노동부가 최근 발표한 올해 임금체불액 현황 자료를 보면 지난달 말 기준으로 건설업종 임금체불 규모는 2천114억3천600만원이다.

단일 업종으로는 5천262억9천500만원인 제조업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 아파트 건설 공사장. 사진=연합뉴스

건설업종 임금체불 피해자는 대부분 도급업체와 장·단기 근로계약을 맺은 일용직 노동자나 손씨와 같은 근로자대기소 운영자다.

손씨는 "정부가 명절이나 연말 때면 체불임금 정리한다고 이런저런 발표를 내놓는데 우리와 상관없는 이야기"라며 "부족한 일감에 소개소나 근로자 모두 외상을 가릴 처지가 아니다"고 말했다.

고용부 관계자는 "전문건설업자가 근로자를 직접 고용하지 않고 '오야지'라고 불리는 현장관리인에게 불법 도급을 하는 경우가 태반"이라며 "이러한 과정에서 발생한 임금체불에 대해서는 연대책임을 묻고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원칙적으로 직업소개소와 근로자 사이에 근로계약은 성립할 수 없다"며 "일용직 건설현장 근로자는 현장에서 직접 임금을 받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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