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영화 신세계] 인종편견 맞선 부부 이야기 ‘러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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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영화 신세계] 인종편견 맞선 부부 이야기 ‘러빙’
  • 신현호 편집인대표
  • 승인 2017.03.02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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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힘으로 세상을 바꾼 60년 전의 백인·흑인 부부의 실화

"질 거 같아요?"

"네, 하지만 괜찮아요. 작은 싸움에 지고 큰 싸움에 이기면 되죠."

한 편의 영화를 보고 나오면 특정한 이미지나 대사가 잔상처럼 남아 쉽게 지워지지 않을 때가 있다. 물론 좋은 영화에 한해서일 터인데, 〈러빙〉의 중반부 즈음 이 대사가 그런 경우다.

새처럼 가녀린 흑인 여성 밀드레드 러빙(루스 네가)이 커다란 눈망울을 깜빡이며 라이프지 기자의 물음에 이처럼 말할 때, 그 의연함이 자아내는 감동이란.

1958년 백인과 흑인의 결혼은 불법이라는 고향 버지니아 주의 법을 위반하고, 가족과 친구들의 우려와 비난을 받으면서도 연인 ‘밀드레드’(루스 네가)와 결혼한 ‘리차드 러빙’(조엘 에저튼).

하지만 행복한 생활도 잠시 버지니아 주는 러빙 부부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그들 부부를 강제 추방한다. 그러다 어느 적요한 밤. 그녀는 법무부 장관에게 보낼 한 장의 편지를 써내려간다. 훗날 세상을 바꾸게 될 한 오라기 씨앗으로서의 작은 편지. 고향을 그리워하는 남편을 위해 용기를 내는 그녀의 모습은 자못 인상적이다.

영화 〈러빙〉은 이 '러빙 부부'의 실화를 영화화한 것이다. 백인 남편과 흑인 아내의 결혼을 불허했던 버지니아주 헌법 체계에 맞선 실존 인물들의 이야기다.

1958년부터 1967년 6월 미국 대법원이 부부의 항소에 손을 들어주며 '타 인종간 결혼 금지법'에 대한 위헌 판결이 내려지기까지 과정이 담겨 있다.

여기서 주목할 건 이 영화의 미학적 전략이다. 〈러빙〉은 기본권 쟁취를 다룬 여느 영화들과 달리 '비장미'와는 거리를 둔다.

여성 참정권 운동을 그린 '서프러제트'가 강경한 투쟁적 어조를 유지했다면, 〈러빙〉은 그 반대다. 전통적인 멜로드라마의 문법을 좇으며 전혀 다른 노선을 걷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의외의 효과를 빚어낸다. 패소와 항소를 거듭하는 지리한 법적 싸움보다는 세상의 편견과 차별을 감내하는 부부의 일상에 카메라가 집중하게 될 때, 그로 인한 정서적 울림이 생각 외로 커지는 것이다.

영화는 오로지 사랑으로, 사랑에 의해 험난한 세상을 헤쳐가는 부부의 하루하루 일상을 세밀화처럼 묘사해낸다. 이것은 끊임없이 법적인 내용이 오가지만 두 사람의 진실한 사랑이 묻히는 건 피하고 싶었다.

사람 대 사람으로서 그 뒤에 놓여 있는 인간성을 지켜보며, 우리의 시각이 넓혀지길 바랐다는 감독 제프 니컬스의 연출 의도가 투영된 것이다.

그래서일까. 영화는 러빙 부부의 사랑과 신뢰의 깊이를 가늠케 해주는 교감의 장면이 많다. 대법원 심리에 불참하기로 한 어수룩한 남편 러빙이 변호사에게 불쑥 "나는 아내를 사랑해요"라고 말할 때, 벽돌공인 그가 자신을 향한 비난의 시선을 견디며 묵묵히 벽돌들을 쌓아올릴 때, 그런 남편을 말없이 지켜보는 아내의 촉촉한 눈빛이 카메라의 렌즈에 잡힐 때, 〈러빙〉은 그 어떤 설교조의 영화보다 설득력 있게 부부가 이뤄낸 가치를 부각해낸다.

이 영화가 사랑스러운 건 그래서다. 〈러빙〉은 자잘하게 일렁이는 물결처럼 저마다의 마음에다 무늬와 질감을 새겨넣는다.

고요한 속삭임으로 우리 모두 당연하게 누려오던 권리들의 소중함을 차분하게 되새기게 해준다. 그 속삭임이 자꾸만 마음을 톡, 하고 건드린다.

지난해 칸영화제 경쟁부문 진출작이다. 밀드레드 러빙을 연기한 루스 네가는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상영시간 123분. 12세 이상 관람가.

http://movie.naver.com/movie/bi/mi/mediaView.nhn?code=143460&mid=33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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