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시론] 대통령 탄핵으로 지킨 헌법적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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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시론] 대통령 탄핵으로 지킨 헌법적 가치
  • 연합뉴스
  • 승인 2017.03.11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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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은 재판관 만장일치의 파면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결국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으로 대통령직을 상실했다. 현직 대통령이 파면된 것은 우리 헌정 사상 처음이다. 헌재는 10일 재판관 8명 전원의 찬성으로 박 대통령의 파면을 최종 결정했다. 이로써 지난해 12월 9일 국회의 탄핵소추 의결로 시작된 대통령 탄핵 국면은 92일 만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정미 소장 권한대행은 오전 11시 21분 '피청구인 박근혜를 파면한다'고 엄숙히 선고했다. 그 순간 대통령 박근혜는 한 명의 자연인이 됐다. 동시에 경호·경비 이외의 전직 대통령 예우가 모두 사라졌다. 사후 국립현충원에 안장될 자격도 없어졌다. 국민의 무거운 신임을 저버리고, 법의 엄정한 명령을 어기고, '최순실 국정 농단'에 개입한 말로다. 그 죄과의 경중을 떠나 4년 간 이 나라를 통치했던 대통령이라는 점에서 보면 인간적 동정심이 일기도 한다. 물론 국가적으로는 큰 비극이자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이 권한대행의 결정문 낭독과 주문 선고는 예상보다 훨씬 짧은 20여 분 만에 끝났다. 신속하고 단호한 진행만큼 결정문의 논거도 명쾌했다. 한마디로 법치주의와 민주주의를 위반한 '법 위의 대통령'은 헌법이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헌재가 먼저 주목한 부분은 대통령의 헌법상 '공무수행 투명성' 의무이다. 최순실 씨의 국정개입을 철저히 숨겨 민주주의 구성의 중대한 요소인 국회와 언론의 감시를 무력화시켰다는 취지다. 대 국민 담화 등을 통해 검찰과 특검 조사를 받겠다고 약속하고 지키지 않은 것과 청와대 압수수색을 불허한 것도 중대한 탄핵 사유였다. 그런 행위들로 대통령이 지켜야 할 헌법적 가치가 훼손되고 국민의 신임을 잃었다는 판단이다. 이 권한대행은 "피청구인의 언행을 보면 헌법수호 의지가 드러나지 않는다"고 했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파면 결정이 헌법을 지키는 길임을 강조한 것이다.

헌재가 심리한 주요 쟁점은 ①공무원 임명권 남용 ②언론의 자유 침해 ③생명권 보호 의무 및 직책 성실수행 의무 위반 ④최순실 국정개입 허용 및 권한남용 등이다. 쟁점 ①과 관련해 헌재는 박 전 대통령의 지시로 유진룡 전 문체부 장관이 면직되고 국·과장 2명이 문책당한 점을 인정했다. 그러나 최 씨의 사익 추구에 방해가 됐기 때문이라고 하기는 어렵다고 봤다. 쟁점 ②는 이른바 '정윤회 문건'과 관련된 것이다. 청와대가 이 사실을 처음 보도한 세계일보를 압박하고 사장의 퇴임을 요구했다는 주장에 대해 헌재는 박 전 대통령의 관여를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고 판단했다. ③은 박 전 대통령의 세월호 사고 당일 대처와 관련된 것이다. 대통령에게 국민의 안전을 보호할 의무가 있지만 성실한 직책 수행 여부는 탄핵심판 대상이 아니라는 게 헌재의 판단이다. 결국 쟁점 ④에서 박 전 대통령의 운명이 갈렸다. 헌재는 최 씨에게 청와대 문건이 다량 유출되고, 박 전 대통령과 청와대 관계자가 최 씨의 사익추구를 위해 나선 사실을 대부분 인정하고, 박 전 대통령의 법 위반이 파면될 정도로 중대하다고 판단했다. 박 전 대통령이 미르·K재단을 통한 최 씨의 이권 개입을 도와줌으로써 기업의 재산권과 경영의 자유를 침해한 사실도 중대 사유로 지목됐다. 헌재는 이처럼 박 전 대통령이 최 씨의 이익을 위해 지위와 권한을 남용한 것은 공정한 직무수행이라 할 수 없고, 헌법·국가공무원법·공직자윤리법 등을 위반한 것이라고 밝혔다. 헌재 재판관 8명은 모두, 쟁점 ④가 탄핵사유로 인정된다고 봤다. 결과적으로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파면 결정은 최순실 씨와 함께 벌인 국정농단 하나로 충분했다.

헌재의 탄핵 결정은 그동안 국정의 발목을 잡았던 각 분야의 불확실성을 대부분 제거했다. 우선 차기 대통령 선거 일정이 확정됐다. '60일 후 대선'을 향한 각 정당의 질주가 본격적으로 달아오를 것 같다. 박 전 대통령 탄핵이 보수와 중도 진영의 후보 구도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주목된다. 특검에서 바통을 넘겨받은 검찰 수사에도 관심이 모아진다. 특검과 검찰 특별수사본부에 의해 드러난 박 전 대통령의 혐의는 열세 가지나 된다. 박 전 대통령의 보호막이었던 불소추 특권이 사라진 만큼 검찰 수사가 급가속할 가능성이 있다. 검찰은 금융계좌 압수수색이나 통신조회 같은 강제수사로 증거를 확보한 뒤 박 전 대통령을 소환조사할 듯하다. 물론 박 전 대통령에 대한 구속수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일각에서는 박 전 대통령 조사를 대선 이후로 미룰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하지만 헌재의 분명하고 단호한 탄핵 결정이 부담스러울 수 있다. 검찰은 법과 원칙을 따르는 것이 최선이다.

이번 탄핵심판은 우리의 치부도 적잖게 드러냈다. 그중 최악을 꼽는다면 단연 허약한 법치주의가 아닐까 싶다. 탄핵 찬·반 세력이 연일 헌재 앞에서 막말 시위를 벌이고, 정치인들도 가세해 부채질하는 나라는 남 앞에 얼굴을 들 수 없다. '기각하면 혁명뿐', '탄핵하면 아스팔트 피바다' 식의 칼날 같은 말들이 춤추는 나라도 마찬가지다. 중대 결정을 앞둔 헌재를 이렇게 막무가내로 압박하는 행위는 법치주의 국가에서 상상할 수도 없다. 까마득한 정치 후진국임을 자인한 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헌재 결정은 법치주의의 진정한 가치와 '힘'을 새삼 일깨웠다. 대한민국의 '제왕적' 대통령도 법을 어기면 '법의 명령'으로 퇴출할 수 있음을 온 국민 앞에 증명했다. 남은 문제는 '불복 후폭풍'이다. 촛불의 '정의'이든, 태극기의 '애국'이든 법치를 훼손하는 순간 모든 명분을 잃는다. 이젠 모두 차분해져야 한다. 손에 손을 마주 잡고 갈등과 대립의 상처를 아물게 할 '치유의 시간'을 가질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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