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주의 시선] 3.1운동과 김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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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주의 시선] 3.1운동과 김마리아
  • 연합뉴스
  • 승인 2018.03.01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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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말에 이르기를 나라를 내 집같이 사랑하라 하였거니와 가족으로서 제집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 집이 완전할 수 없고, 국민으로서 제 나라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 나라를 보존하기 어려운 것은 아무리 우부우부(愚夫愚婦)라 할지라도 밝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아! 우리 부인도 국민 중의 일분자이다. 국권과 인권을 회복할 목표를 향하여 전진하고 후퇴할 수 없다. 국민성 있는 부인은 용기를 분발하여 그 이상에 상통함으로써 단합을 견고히 하고 일제히 찬동하여 줄 것을 희망하는 바이다."

1919년 9월 김마리아가 작성한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취지서의 일부이다.

3.1운동 하면 우리는 바로 유관순을 떠올린다. 그러나 김마리아 역시 3.1운동의 불길을 댕긴 대표적인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3월 13일은 김마리아가 세상을 떠난 날이다. 그는 2.8 독립운동을 시작으로 평생을 민족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가 해방을 채 보지 못하고 1944년 이날 눈을 감았다.

▲ 김마리아

김마리아는 1892년 6월 18일 황해도 장연 소래에서 출생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으며 대지주였던 부친은 마을에 교회와 학교를 세웠다. 1895년 부친이 설립한 소래학교에 입학, 1901년 졸업했다. 1905년 서울로 올라와 세브란스병원에 근무하던 삼촌 김필순의 집에 기거하며 이듬해 정신여학교(연동여학교)에 들어갔다. 삼촌의 집에는 김규식, 노백린, 안창호, 이동휘 등 애국지사들의 출입이 잦았다. 소녀 시절 김마리아는 이들을 보며 조국애를 키워 나갔다. 1910년 정신여학교를 졸업하고 광주 수피아여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1913년 정신여학교로 전근해 수학을 가르치다가 다음 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김마리아는 히로시마의 여학교를 거쳐 1915년 도쿄 메지로여자학원 전문부에 입학했다. 1918년 말 황에스터 등과 도쿄 유학생독립단에 가담했고, 이어 2·8 독립운동 준비에 들어갔다. 여자 유학생들은 성금을 거둬 독립운동 자금에 보탰고, 당일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독립선언대회에 참석했다. 김마리아는 다른 유학생 수십 명과 경시청에 연행됐다가 풀려났다.

2·8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조선청년독립단 대표 11명 중 여학생은 없었다. 김마리아는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독립운동에 참여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꼈다.

김마리아는 독립운동을 국내에 전파하기 위해 2.8 독립선언서 10여 장을 미농지에 베껴 기모노 허리띠에 숨기고 2월 15일 부산으로 들어왔다. 그때까지 여자 유학생에 대해서는 일본 경찰의 감시가 느슨했다. 그는 서울, 대구, 광주, 황해도 일대에서 3·1 운동 사전 준비 작업을 벌였다. 3월 1일 당일 황해도 봉산에서 여성들의 참여를 독려하던 중 3.1운동 소식을 듣고 서둘러 서울로 올라왔다가 3월 5일 모교에서 학생들과 함께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배후 지도자로 지목된 김마리아는 3월 27일 이른바 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다. 몇 달씩 옥고를 치르고 그해 8월 5일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됐다. 이때의 고문으로 뼛속에 고름이 차는 유양돌기염과 상악골 축농증이 생겨 평생 고통을 받았다.

출감 후 김마리아는 침체한 여성 독립운동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기존의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바탕으로 조직을 전국 규모로 확대하고 임원 개선을 단행했다. 그는 1919년 9월 모교에서 비밀리에 황에스터 등 20여 명의 여성 지도자들과 함께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다시 결성하고 회장에 추대됐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는 전국적인 항일 여성조직으로 커 나갔다. 전국 15개 지역에 지부를 설치하고 2천여 명의 회원을 확보했다.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그해 11월까지 군자금 6천여 원을 상하이임시정부에 전달했다. 그러던 중 한 간부의 배신으로 11월 28일 애국부인회 회원 52명이 체포되어 취조를 받고 김마리아 등 9명은 기소되어 1~3년형을 선고받았다. 대구지방법원과 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받고 상고했으나 1921년 6월 21일 경성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형이 확정됐다. 옥고와 고문으로 사경을 헤매게 되자 외국인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1920년 5월 22일 6개월 만에 병보석으로 출감했다. 그는 치료를 받고 요양하다가 변장을 하고 인천으로 탈출, 망명길에 나서 1921년 8월 초 상하이에 도착했다.

▲ 병상에 누운 김마리아 동아일보 1920.6.2

김마리아는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난징의 진닝대학에서 공부하며 상하이 대한민국애국부인회 간부로 활동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을 보조하는 한편 임시정부 입법기관인 임시의정원에서 황해도 대의원으로 선출됐다. 최초의 여성 대의원이었다. 1923년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여성계 대표로 참석했다.

그러나 독립운동 단체 간 알력으로 독립운동이 쉽지 않자 김마리아는 독립을 위한 실력을 기르기 위해 공부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미국 유학길에 올라 1923년 7월 11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했다. 1924년 9월 미국 미네소타주 파크빌에 있는 파크 대학 문학부에 입학하여 2년간의 수업을 마치고, 다시 시카고대학 사회학과에 진학했다. 대학 도서관에 근무하며 학부과정과 연구 과정을 마치고 1929년 사회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김마리아는 미국에서 황에스터, 박인덕 등 옛 동지 8명을 만났다. 1928년 2월 12일 여자 유학생들이 모여 여성 독립운동단체인 근화회(재미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 김마리아를 회장으로 추대했다. 이들은 재미동포들의 애국정신을 북돋우고, 재미 한인사회의 독립운동을 후원했다. 또한, 출판과 강연으로 일제의 악랄한 식민통치를 외국인에게 알렸다. 김마리아는 1930년에는 뉴욕의 비블리컬 세미너리에 들어가 신학을 공부했다.

김마리아는 형기가 만료된 후 1935년 원산에 있는 마르타 윌슨 여자신학원에서 신학 강의만 한다는 조건으로 13년의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했다. 이후 여생을 기독교 전도사업과 신학 발전에 기여했다. 1934년 장로교 제7대 여자전도회장에 선출돼 제10대까지 연임했다. 김마리아는 종교 모임과 강론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일제는 기독교계 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이를 교회로까지 확대하기 위해 압력을 행사했다. 1938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를 계기로 각 교파 목회자들까지 신사참배에 나섰으나 김마리아가 이끄는 여자전도회는 공식적 모임을 회피함으로써 신사참배를 하지 않았다.

김마리아는 두 차례 투옥 중에 받은 고문 후유증이 재발해 평양기독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던 중 광복을 1년여 앞두고 1944년 3월 13일 사망했다.

▲ 김마리아 동상

여성교육이 전무했던 시절 일본과 미국에서 공부하고, 대한 독립과 결혼했다며 평생 독신으로 독립운동과 민족 교육, 여권 신장을 위해 헌신한 김마리아.

2.8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귀국하여 전국 각지를 돌며 거국적인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호소하여 3.1운동을 촉발한 장본인이었다.

안창호는 평소에 "김마리아 같은 여성동지가 열 명만 있었던들 대한은 독립됐을 것이다"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미국 유학 중 연설에서 김마리아는 "우리는 우리의 노력으로 성취될 때까지 우리 자신의 다리로 서야 하고 우리 자신의 투지로 싸워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진정한 지도력이 필요합니다"라고 역설했다.

지금까지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남성 독립운동가들보다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했다. 여전히 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잊혔다.

▲ 김마리아 어록비

정부는 1962년 김마리아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1989년 서울 보라매공원에 그의 동상이 건립됐고, 2004년에는 독립기념관에 어록비가 세워졌다.

내년이면 3.1운동 100주년이 된다. 새봄을 알리는 3월의 첫날, 여성이라는 자각과 대한민족이라는 자각 속에서 독립을 위해 헌신한 김마리아의 삶을 기억하며 역사적 책임을 생각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글로벌코리아센터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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