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로 칼럼] 잊지 말아야 할 '10월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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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로 칼럼] 잊지 말아야 할 '10월26일'
  • 연합뉴스
  • 승인 2018.10.25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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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나 민족에게 잊지 말아야 할 날들이 있다. 특히 질곡의 근현대사를 체험한 우리 민족에겐, 결코 몰라서도, 망각해서도 안 될 날들이 적지 않다. 10월 26일도 바로 그런 날 중 하루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만주 하얼빈 역에 내리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대한의군 참모중장인 안중근 의사가 저격한 의거는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린 계기가 됐다. 안 의사는 전 세계의 주목을 받던 재판에서 일본의 대륙침략 의도를 만천하에 폭로했다. 을사늑약 후 고종이 도모했던 헤이그 특사 파견은 당초 목적을 완전히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안중근은 거사의 진정한 목표를 달성하고 순국했다.

▲ 안중근 의사 순국 108주기 추모식 [연합뉴스 자료사진]

"내가 죽거든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조국의 국권이 회복되면 고국으로 반장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면서 만세를 부를 것이다." (안중근 최후의 유언)

광복 70년이 지났건만 의사의 유해는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고, 유해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책무를 다하지 못한 무거움이 어깨를 짓누른다. 현재 유해가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는 중국 다롄의 뤼순(旅順) 감옥 묘지 등 3곳 정도가 꼽힌다고 한다. 남북이 내년 3·1운동 100주년을 공동으로 기념하기로 함에 따라 여러 사업이 추진될 것으로 예상되고, 안 의사 유해 발굴 사업도 검토되고 있다니 기대를 다시 가져 본다.

안 의사는 의거 후 옥중에서 '동양평화론'의 집필에 매달렸다. 동양의 대표 국가인 한중일 3국이 각기 주권을 갖고 대등한 위치에서 국제사회에서 서로 협력하고 평화공동체를 결성하자는 주장이었다. 뤼순을 중립화한 뒤 3국이 대표를 파견해 동양평화회의를 조직하는 것을 포함해 공동은행 설립과 공용화폐 발행 등 몇 가지 구체적 방안도 제안했다. 벌써 그때 지금의 유엔, 유럽연합(EU)과도 같은 동아시아 평화공동체를 얘기했고, 거대 담론을 제시했다.

그로부터 100년이 훨씬 지났지만, 동북아의 진정한 평화는 아직 요원한 상태다. 독립된 조국은 남북으로 분단됐고, 한중일 3국 간 상호 관계도 여전히 불안정하다. 국교 정상화 50년이 넘은 한일관계는 특히 그렇다.

1965년 한일관계 정상화 이후 가장 획기적인 관계 진전은 1998년 김대중 당시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일본 총리가 채택했던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 때 이뤄졌다. 한일 외교 사상 처음으로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반성과 사죄가 공식 합의 문서에서 명확히 규정됐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해 오부치 총리는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했다. 한국의 일본 대중문화 개방, 일본 내 한류 열풍 등이 이어지며 민간교류의 지평도 넓혀져 갔다.

국교 정상화 이후 30여년 만에 한일관계는 한 단계 진전하는 역사적 계기를 마련했지만, 그로부터 정확히 20년이 지난 현재의 양국 관계는 오히려 그때보다 더 후퇴하고 있다.

기회만 되면 끊임없이 역사 수정주의 논란을 촉발하는 아베 총리의 역사 퇴행적 행보와 일본 사회의 전반적인 보수화 경향 탓이 크다. 하지만 일본만을 비난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한일관계 회복 없는 동북아 정세는 불안정 요인을 잠복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과거를 직시하지 않는 일본에 대한 분노 표출은 쉽지만, 그것에 머무를 수만은 없는 이유다.

한일 양국 지도자들은 모두 미래지향적 관계를 얘기하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 목표에 도달할지, 현실적 청사진도 냉철한 전략도 제대로 제시 못 하고 있다. 깊은 고뇌가 느껴지지 않는 추상적이고 공허한 말 잔치가 대부분이다. 양국 간에는 넘어가야 할 만만찮은 도전들도 대기 중이다.

며칠 뒤면 다시 '그 날'이다. 109년 전 안중근은 동양평화를 논했다. 죽음을 목전에 앞둔 옥중에서도 평화공동체를 얘기했다. 안 의사가 목숨을 바치며 얻고자 했던 것은 단순한 독립을 넘어서는 것이다. 선악의 이분법을 넘는 이웃 국가와의 새로운 공존과 동북아 평화 질서 구축에 대한 갈구였던 셈이다. 이제 누가, 그 점을 찍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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