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혀버린 진실 밝혀달라"…5·18유족회에 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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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혀버린 진실 밝혀달라"…5·18유족회에 호소
  • 지종선 기자
  • 승인 2024.01.22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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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당시 김화중정형외과의원 원장 딸 증언
5·18 당시 김화중정형외과의원 모습과 김화중 원장(오른쪽) 모습
5·18 당시 김화중정형외과의원 모습과 김화중 원장(오른쪽) 모습

5·18 진상규명조사위원회 활동이 사실상 종료된 2024년 새해에 5·18 당시 가족과 관련한 진실을 세상에 알려달라는 한 여성이 5·18유족회의 문을 두드렸다.

유족회를 찾은 주인공은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의 중심지였던 동구 대의동 김화중정형외과의원 원장의 딸인 김모(56세) 씨다.

김 씨는 평생을 어릴 적 아픈 기억을 지우지 못하고 가슴에 안고 타지에 살면서 부친의 헌신적인 활동과 은폐된 사실을 힘겹게 털어놨다.

김 씨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의사인 부친이 부상자 치료 등 헌신을 다해오다 그 후유증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며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김화중정형외과의원은 전남도청과 상무관, 동부경찰서에 인접해 있었다.

김 씨는 아버지는 당시 군인들이 시위대를 쫓아다니는 총성소리, 시위대의 비명소리 등 공포의 아비규환 속에서 목숨을 걸고 부상자를 치료하고 숨겨주는 등 인술과 선행을 실천했다고 회고했다.

또 병원 근처에는 광주MBC 방송국이 있어 시위대의 방송국 방화 등 날이 갈수록 혼돈과 혼란 속에서 부친인 김 원장은 직원들과 어린 5남매에게 살아도, 죽어도 함께해야 한다며 한 방에서 공포의 밤을 지새우면서 부상자 치료에 헌신을 다했다고 기억했다. 김 원장의 당시 나이는 40대 중반이었다.

총상을 입은 부상자들은 수없이 밀려들었고 시위대 일부도 들어와 숨었다. 이때 진압군이 의원을 들이닥쳤고 마구잡이로 환자들을 잡아들이면서 이를 제지하던 김 원장은 한쪽 다리를 크게 다쳐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다가 5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김 원장은 몸이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찾아오는 부상자들의 도움 요청을 마다하지 않고 대검을 장착한 총과 곤봉을 휘두르며 들이닥친 진압군을 맨몸으로 가로막으며 시민들을 보살폈다.

김 씨는 “자식으로서 봉사와 헌신의 삶을 살다 가신 아버지를 경황없이 떠나보낸 아쉬움과 죄책감에 이제라도 묻혀버린 사실들을 세상에 알리는 게 자식된 마지막 도리라고 생각해 용기를 내 세상에 밝히게 됐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러면서 그는 “어떠한 경우에도 이러한 불행이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증언을 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당시 의원에 함께 근무했던 사무장 이 모 씨도 동행해 그때의 병원 상황과 김 원장의 선행을 증언했다.

그는 김 원장은 총상을 입고 실려온 학생시민군 등 응급상태의 그들에게 ‘치료에 최선을 다하자’며 환자의 진료기록을 남길 수 없을 만큼 급박하게 치료에 전념했다고 회고했다.

이 사무장과 의원에 함께 근무하며 선행을 실천한 직원들도 입을 모아 시민들에게 베풀었던 김 원장의 숭고한 뜻과 선행이 후세에 정당한 평가를 받아 이를 본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고 김화중 원장의 딸 김 모씨
고 김화중 원장의 딸 김 모씨

김 씨는 "한때 폭도의 내란이라는 등 사회 분위기로 불이익을 당할까봐 숨죽이며 살아왔던 지난 시절이 아쉽기만 하다"며 "40여 년이 넘은 지금까지 사실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아 우리가 알고 있던 진실을 묻어버릴 수는 없어 마땅히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용기를 냈다"고 밝혔다.

김 씨와 면담을 마친 임옥란 5·18유족회 사무총장은 "증언을 들으니 가슴이 먹먹하다. 이런 진실들이 세상 곳곳에 묻혀있을 텐데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현실이 안타깝다"면서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은폐되고 숨겨진 진실을 밝히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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