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특집] "전두환 술먹으면 '어머니 노래' 불러…어린시절 회상하며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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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특집] "전두환 술먹으면 '어머니 노래' 불러…어린시절 회상하며 눈물"
  • 연합뉴스 기자
  • 승인 2024.03.16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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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은 욕할줄 몰라, 가장 큰 욕은 '한심한∼ 놈'"
"김대중, 건조한 사람이지만 아는것 많고 사고 유연성"
대통령중 베스트로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노무현 꼽아…[삶] 인터뷰이들

편집자 주= 이번 특집은 2022년 9월 이후 삶 인터뷰에서 인터뷰이들이 역대 대통령에 대해 평가한 내용을 발췌해 묶은 것입니다.

2006년 10월 최규하 전 대통령 영결식에서 전두환, 김영삼, 김대중
[연합뉴스 자료사진]

한국의 역대 대통령들 가운데 베스트 3명을 뽑는다면 누구일까.

연합뉴스가 2022년 9월부터 진행한 [삶] 인터뷰에서 이런 질문을 했는데, 인터뷰이들의 답변은 저마다 달랐다.

다만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노무현을 꼽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많았다.

이승만은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세웠으며, 박정희는 경제성장을 이뤄냈고, 김대중은 민주화에 기여했으며, 노무현은 권위주의를 무너트렸다는 것이 인터뷰이들의 설명이다.

인터뷰이들의 이런 평가가 정확하다고 볼 수는 없다.

무엇보다 5년 단임의 대통령들은 성과를 내기가 쉽지 않다. 레임덕을 고려하면 실제로 대통령으로 일할 수 있는 기간은 3년에 불과한 데다 그 성과는 대통령을 마친 후에 나타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다음 내용은 역대 대통령 평가와 관련한 인터뷰이들과의 일문일답이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최연혁 교수

◇ 최연혁 스웨덴 린네 대학교 정치학과 교수(현재 연구교수로서 한국에서 연구 활동 중)

-- 본인은 전 세계 정치인들 리더십을 연구하고 있는데, 세계 전·현직 정치 리더들 가운데 베스트로 꼽을만한 인물이 있다면 누구인가.

▲ 1위는 단연 링컨이다. 그는 미국의 대통령으로서 전쟁을 불사하면서까지 미국의 분열을 막았는데 이는 노예해방, 인간해방을 위한 것이었다. 인간의 역사는 통제와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는 해방의 과정이다. 여성 해방, 장애인 해방, 동물 해방 등이 그렇다. 링컨은 이런 운동에 영향을 준 정치운동의 역사적 토대를 마련한 사람이다. 그러니 시대를 앞선 가치를 실천한 세계적 지도자라 할 수 있다. 링컨의 지도력이 없었다면 미국은 미합중국으로 남아 있을 수 있었는지 의문이다. 미국에 인간의 평등과 존엄을 중시하는 민주적 가치가 뿌리 내리는 것이 쉽지 않았을 수도 있다.

미국 16대 대통령 링컨
[연합뉴스 자료사진]

-- 세계적 리더로 꼽을 수 있는 다른 인물은.

▲ 2위는 넬슨 만델라다. 그는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화해와 용서를 실천한 사람이다. 그는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이 된 이후 1명의 백인도 구속하지 않았다. 25년간 로벤섬과 폴스무어 교도소에 갇혀 지냈고, 많은 동료가 고문으로 죽었지만, 그는 백인들을 용서했다. 남아공이 폭력과 대립 없이 아프리카의 모범적인 민주주의 국가로, 경제적 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만델라의 이런 포용적 리더십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의 이런 정신은 오랫동안 감옥 생활을 하면서 집중했던 독서와 수양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만델라가 석방되던 날 그를 10년 이상 지켜본 로벤섬 교도소의 백인 간수들은 그를 흠모했다고 고백했다. 만델라의 포용과 절제, 국가에 대한 사랑, 끊임없는 독서 등을 봐왔기 때문이다.

-- 링컨, 만델라 외에는 어떤 인물들이 있나.

▲ 3위로는 미국의 루스벨트, 영국의 처칠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 모두 뛰어난 리더십으로 독일의 히틀러를 막아낸 인물이다. 2차대전 후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에 수많은 독립 국가들이 세워질 수 있도록 한 장본인들이다. 마하트마 간디는 비폭력 평화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로, 1960년대 민주시민운동의 중요한 좌표를 설정한 사람이다.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 가족의 모습
육영수 여사, 지만, 근혜, 근영
[연합뉴스 자료 사진]

-- 국내 대통령들 가운데 나라에 기여한 사람 3명을 꼽는다면.

▲ 모든 대통령에게는 공과(功寡)가 있다. 이를 감안해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나는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대통령을 꼽는다. 박정희는 한국의 산업화를 이룬 사람이다. 그가 민주주의를 억압했지만, 경제개발에 성공한 점을 인정해야 한다. 이승만은 산업화가 가능하도록 남한에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세운 사람이다. 3.15부정선거라는 오점을 남겼지만, 우리나라에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세우지 않았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불가능하다. 김대중은 민주화를 이루는 데 공이 있었던 사람이다.

-- 산업화는 시민들을 각성시켜 민주주의의 토대가 된다는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 역설적으로 그런 측면이 있다. 산업화가 민주화를 만들어낸 사례는 있지만, 민주화가 산업화를 일으킨 경우는 없다. 과거 한국의 학생운동권은 민주화가 이뤄지면 산업화는 저절로 진행된다고 주장했지만 제 3세계나 남미 등에서 그런 사례는 없다. 산업화와 민주화가 상호작용을 하면서 함께 성장한 사례는 있다. 영국이 그런 나라다. 이 나라에서는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의회주의, 의원내각제, 총리제가 도입됐고, 국왕이 서서히 권력을 내려놓았다.

-- 박정희 시대 한국의 산업화는 국민이 예금한 돈을 저금리로 빌려주고, 노동력 착취를 허용하는 등 국민 희생적 방식으로 진행된 것이고, 그렇게 성장한 재벌들이 아직도 한국 경제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문제라는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 대부분 나라의 산업화가 노동력을 착취하면서 진행된 측면이 있다. 100년 전만 해도 영국뿐 아니라 스웨덴에도 아동 노동이 있었다. 영국에는 산업혁명 직전까지 노예제가 있었다. 미국에도 흑인 노예제가 있었고, 아직도 석유 재벌, 철강 재벌이 3∼4대에 걸쳐 부자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진중권 교수

◇ 진중권 광운대 교수

-- 역대 대통령 중에서는 누가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하나.

▲ 박정희,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세 분이 대한민국을 만들었다고 본다. 박정희 대통령은 산업화에 성공했다. 독재를 했지만 그 체제가 18년간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민중들의 암묵적인 동의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수평적 정권 교체를 이뤘고, 산업사회를 정보화 사회로 바꿨다. 노무현 대통령은 한국을 수직적 구조에서 수평적 네트워크로 전환했다. 전두환·노태우 대통령은 경제를 시장주도로 바꾸는 역할을 했다. 과거의 보수정권과 진보정권은 자기들에게 맡겨진 역사적 과제를 수행했다고 본다. 산업화와 민주화의 두 가지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나라는 전 세계에서 한국밖에 없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윤여준 전 장관

◇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

-- 본인은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 공보비서관을 했는데, 어떤 업무를 했나.

▲ 대통령의 경제 연설문 작성을 했고, 부인인 이순자 여사의 일정을 담당하는 일을 맡았다. 나는 이 여사의 공식 행사 가운데 20% 정도만 언론에 보도되도록 했다. 이 여사가 섭섭해하는 것 같다는 말을 부속실 비서로부터 전해 들었지만 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 전두환 대통령은 어떤 사람이었나.

▲ 그는 직선적이며 행동파였고, 뒤끝이 없었다. 술을 마시면 '나실 때 괴로움'으로 시작되는 어머니 노래를 불렀다. 어릴 때 그의 집안은 가난했다. 그는 9살 아래인 동생 전경환을 업고, 남의 집 밭일을 나간 어머니를 밤늦게 동네 어귀에서 기다리곤 했다고 한다. 배추 뿌리를 얻어온 어머니는 그걸 칼로 잘라서 뒤 먹을 것으로 줬다고 그는 전했다. 전 대통령은 그런 이야기를 하면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전 대통령이 동생 전경환에게 가진 애정은 아버지가 아들을 대하는 듯한 심정이었던 것 같다.

-- 이순자 여사도 전경환에 대해 같은 생각이었나.

▲ 이 여사도 전경환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 화를 냈다. 이 여사한테 전경환 문제에 관해 이야기했더니 "우리 삼촌(전경환)이 대통령 동생으로 편하게 술이나 마시고 지낼 수 있지만 사회에 기여하겠다는 뜻으로 잠바때기 걸치고 3등 기차를 타고 전국을 다니면서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고생하는데, 대통령 동생이라고 해서 욕하는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이라고 했다.

1992년 12월 21일 노태우 대통령, 김영삼 대통령 당선인과 회동
노태우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김영삼 대통령 당선인의 예방을 받고 두손을 잡으며 반갑게 맞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 김영삼 대통령은 어떤 사람이었나.

▲ 경청하는 스타일이었다. 본인의 뜻에 반대하는 이야기를 해도 불쾌한 안색을 하거나 말을 끊지 않았다. 그는 어휘력이 없어서 욕을 할 줄도 몰랐다. 욕을 한다는 것은 '한심한 놈'이라는 표현이었다. 아주 심한 욕은 '한'을 길게 빼서 '한∼심한 놈'이라고 하는 정도다. 일각에서는 그가 머리가 나쁘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직관력이 발달했고 사안에 관해 설명하면 빨리 이해했다. 다만 정보를 글이 아닌 청각을 통해 입수하는 사람이었다. 신문의 가십도 비서관이 읽어줄 정도였다.

-- 민자당 대표 당시 김영삼이 현직 대통령인 노태우에게 폭언한 적이 있다고 하던데.

▲ 어느 날 저녁 무렵에 김 대표가 청와대의 노 대통령을 찾아왔는데, 고성이 오갔다고 한다. 김 대표는 안기부가 자신을 모략한다고 해서 화가 난 것인데, "내 손에 죽고 싶으냐"는 김 대표의 발언이 문밖에서 들렸다고 한다. 당시 이 말에 분노한 대통령 비서관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면서 나에게 전해준 이야기다. 김영삼 대통령은 성격이 강해서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박찬종 변호사

◇ 박찬종 변호사

-- 한국의 역대 대통령 가운데 성과를 낸 사람은 누구인가.

▲ 이승만은 건국 대통령이다. 우리나라는 동북아시아의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데, 이 고립된 작은 나라에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구축한 것은 그의 공로다. 집권 말기에 부정선거가 이뤄진 것은 과오다. 이승만은 부정선거가 진행되는 것을 몰랐다고 한다. 나는 그의 공(功) 과(過) 비율이 9대 1이라고 생각한다.

-- 이승만이 가장 큰 성과를 거뒀다는 것인가.

▲ 박정희는 우리나라 산업기반을 다졌다. 자동차, 조선, 철강, 반도체, 석유화학, 건설 등이 한국의 산업 기반인데, 이는 박정희의 중화학 공업 육성 전략 때문에 가능했다. 그가 유신을 선포한 것은 잘못이다. 나는 박정희 공과가 역시 9대 1 정도로 생각한다.

-- 성과가 있더라도 잘못이 있으면 희석되는 것 아닌가.

▲ 중국의 마오쩌둥(모택동)은 1950년대 대약진운동, 1960년대 문화대혁명을 진행하면서 수천만 명을 죽였다. 특히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중국의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을 황폐화시켰다. 제자가 스승을 두들겨 패고, 아들이 아버지 갈비뼈를 부러뜨렸다. 이런 모택동에 대해 덩샤오핑은 7대 3으로 공과가 있다고 평가했다. 덩샤오핑의 아들은 문화혁명 기간에 홍위병의 난동으로 반신불수가 됐는데도 마오쩌둥에 대해 상당히 좋은 평가를 해준 것이다. 이승만과 박정희가 잘못한 부분이 분명히 있으나 잘한 점은 인정해줘야 한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식에서 맥아더 장군, 이승만 대통령, 윤치영 내무부 장관
[연합뉴스 자료 사진]

-- 그 이후의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 그다음의 대통령들은 공과를 평가할 정도가 못 된다. 국가의 장기 발전 계획이라는 것이 없었다. 김영삼은 집권 초기에 사람들을 잡아들여 인기가 많이 올라갔지만, 그런 식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자식(김현철) 문제로 궁지에 몰리고 말았다. 김대중과 노무현도 김정일을 만난 것 외에는 재임 중 이뤄낸 게 없다. 이명박은 서울시장 당시에는 청계천을 남겼지만, 대통령 시절에는 내놓은 게 없다. 탄핵당한 박근혜는 말할 것도 없다. 전두환은 광주 문제를 일으켰고, 노태우도 군사정권이었다.

-- 박정희의 공(功)이 가장 크다는 것인가.

▲ 역대 대통령들이 박정희가 만든 기반을 철저하게 다져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런데도 나라가 유지된 것은 박정희가 워낙 견고하게 터를 만들고, 제대로 된 방향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그때 이후 정권이 아닌 민간이 움직이는 나라다.

1998년 2월3일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의 주례 회동
[연합뉴스 자료 사진]

-- 김영삼은 어떤 사람인가.

▲ 그는 김대중과 원내 대표 경쟁을 네 번 했는데 모두 이겼다. 사람을 끄는 능력이 탁월했기에 가능했다. 문제는 그가 경제를 몰랐다는 점이다. 경상수지 같은 경제용어를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당시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보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OECD에 가입하려면 외환의 문을 넓혀야 하는데, 그것이 경상수지 악화의 요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김 대통령한테 직접 설명했지만 이해하지 못했다. 결국 한국은 외환위기를 맞았다. 김영삼이 경제를 제대로 알았다면 외환위기를 피할 수 있었다고 본다.

-- 김영삼에게 인간적 매력은 있었나.

▲ 사람을 아들이나 조카 대하듯이 했다. 밥을 먹으면서 상대방의 심기를 살필 줄 알았다.

-- 김대중은 어떠했나.

▲ 김영삼과 반대라고 보면 된다. 드라이한(건조한) 면이 있는 사람이다. 여러 명이 식사하러 가면 김영삼은 다른 사람한테 돈을 줘서 계산하도록 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본인이 직접 카운터에 걸어가서 "얼마요?" 하면서 돈을 직접 헤아려 줬다. 두 사람은 그런 차이가 있다.

-- 알려진 대로 김대중은 지적인 사람이었나.

▲ 몇 차례 김대중과 단둘이 심층적인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는 아는 것이 많고, 자기가 모르는 것을 인정하는 스타일이다. 그게 김영삼과 다른 면이다.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단둘이 마주 앉았다. 김영삼이 "니는 말이다, 쉬운 걸 왜 그리 복잡하게 생각하노?"라고 했다. 그러자 김대중은 "거시기 말이여, 자네는 너무 쉽게 생각한당께"라고 답변했다고 한다. 외환 문제로 인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보류하자는 의견을 내면 김영삼은 "씰데 없는 소리"라면서 역정을 내겠지만 김대중은 "다시 한번 이야기해봐"라고 한 뒤 들어보고는 "그것도 그럴 것 같네. 좀 생각해보자"라고 물러설 사람이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김종인 위원장

◇ 김종인 개혁신당 공천관리위원장

-- 역대 대통령 중 성과가 있었던 분은 누구인가.

▲ 이승만은 대한민국 기초를 만드는 데 공을 세웠다. 정부를 수립하고 6·25전쟁을 겪었으며 한미 방위조약을 맺었다. 그런데 그분은 권력에 대한 욕심이 많아서 파행했고 말년에 좋지 않은 국면을 겪었다. 박정희는 군사 쿠데타로 집권했지만, 경제발전의 업적을 남겼다. 그도 세상이 변하는 것을 몰라서 불행을 겪었다. 전두환은 반도체 산업이 성장할 수 있도록 정책을 최종적으로 결정한 사람이었다. 노태우 대통령 당시에는 소득분배가 잘돼서 중산층이 많이 생겼다. 경제 인프라도 건설됐다.

-- 김영삼 대통령은 어떠했나.

▲ 김영삼 정부는 외환위기로 한국경제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김대중 정부에서는 외환위기 극복과정에서 양극화가 더 심해졌다.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도 평가할 만한 게 없다고 본다.

-- 너무 가혹한 평가 아닌가.

▲ 김대중은 김정일과 6.15선언을 하고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그것 외에 특별히 한 것이 없는 것 같다. 노무현은 수평적 문화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대통령을 그런 것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권위주의는 시대가 바뀌면 저절로 청산될 수 있는 것이다.

-- 역대 대통령들의 성격적 측면은 어떤가.

▲ 전두환은 자기가 한번 결심한 것도 논리적으로 설득을 당하면 고치는 장점이 있었다. 노태우는 온화했고. 박정희는 머리가 예리했다. 문재인은 나한테 부탁을 해서 내가 민주당을 제1당으로 만들었지만, 그 후에 (고맙다는) 전화 한번 걸어오지 않았다. 박근혜에게도 도움을 줬지만, 대통령이 된 뒤에 전화 통화도 없었다.

영상 보는 박근혜와 김종인
2012년 10월 당시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후보가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열린 '중소기업 타운홀 미팅 간담회'에 참석, 중소기업회의 발표 영상을 보고 있다. 박 후보 오른쪽이 김종인 국민행복추진위원장.

-- 박근혜 대통령과는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어떠했는가.

▲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나경원 한나라당(현 국민의힘) 후보가 떨어지고 무소속 박원순 후보가 당선됐다. 한나라당에서는 홍준표 대표체제가 무너졌고 박근혜가 비상대책위원장을 맡게 됐다. 그가 도와달라고 했다. 나는 얼굴을 내놓고는(공개적으로는) 못 도와준다고 했더니 "내가 아닌 나라를 위해 도와달라"고 했다. 그래서 비대위원으로 참여했다. 그런데 국회의원 후보 공천과정에서 박근혜와 갈등이 생겼다. 경제민주화를 실현하려면 이를 입법할 수 있는 전문 의원이 있어야 한다. 박근혜는 그런 사람들은 공천에서 배제하고 경제민주화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공천했다. 그와 헤어졌다.

-- 대선 때 또다시 박근혜를 도와주지 않았나.

▲ 그렇다. 박근혜가 경제민주화를 반드시 실천할 테니 도와달라고 했다. 나는 경선준비위원장이 됐다. 그가 대통령 출마 선언을 할 때도 경제민주화를 앞세우도록 했고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에서도 그렇게 하도록 했다. 본격적 선거에 들어가서는 행복추진위원장을 맡아서 선거공약을 만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박 후보가 공약에 관해 나의 대면 설명을 들으려 하지 않고, 서면으로 제출하라고 했다. 그러더니 나와 상의도 없이 재벌개혁과 관련한 특정 주요 공약을 철회한다고 발표했다.

-- 그래서 결별했나.

▲ 나는 한 방송에 출연해서 "박 후보가 로비를 당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선대위 간부들 10명과 함께 호텔 비즈니스룸에서 나를 만나 항의했다. 함께 온 사람들은 박 후보가 로비를 받았다는 증거를 대라고 했다. 나는 (같이 일하기) 싫으면 안 하면 되는 것이지 왜 그걸 굳이 추궁하느냐고 했고 박 후보는 소리를 지르고 나가버렸다.

-- 그것으로 박근혜와 더는 접촉하지 않았나.

▲ 대통령 후보 등록하는 날 박근혜는 나한테 전화해서 (경제민주화에 대해) 생각을 달리(우호적으로)할 테니 계속 도와달라고 했다. 결국, 나는 경제민주화는 박 후보가 제일 잘할 것이라는 기자회견까지 했다. 그런데 그가 대통령 당선 후 인수위원회 시절에 경제민주화라는 단어를 한 글자도 남겨놓지 않고 모두 지워버렸다. 박근혜의 비극은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2005년 고위공직자 인사검증시스템 개선 토론회에서 당시 노무현 대통령과 문재인 민정수석
[연합뉴스 자료 사진]

-- 그 후에는 문재인을 도왔나.

▲ 당시 여당인 새누리당(현 국민의힘) 사람들은 20년 장기 집권을 생각했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확고한 지지층이 35%이고 그의 주변이 깨끗해서 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180석을 얻을 것이라는 분석이었다. 민주당은 안철수의 탈당으로 분열된 상태였다. 그래서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한국도 일본처럼 보수 단일정당 체제로 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돌았다. 나는 일본의 시스템이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정당 간 경쟁이 없는 정치는 제대로 안 되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 문재인이 우리 집에 사흘간 찾아와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민주당에 가게 됐다. 내가 생각하는 전략에 의해 민주당은 제1당이 됐고 여소야대가 이뤄졌다.

-- 이후 문재인 정부 성과는 어떠했나.

▲ 박근혜 정부가 무너졌으면 새로운 정치 질서를 만들었어야 했는데, 문재인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제일 잘했다는 것이 북한 문제였는데, 성과로 나온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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