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의 이탈에 의료진 피로 누적…다수 병원 교수 근무 주 52시간 논의
미복귀 전공의에 대한 면허정지 처분이 잠정 보류된 가운데 전국 의대 교수들의 '무더기 사직'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정부는 서울대병원을 찾아 의과대학 정원 증원에 대한 의견을 수렴하는 등 의정 협의에 나서기로 했으나, 아직 구체적인 해결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전국 의대 40곳 중 39곳이 포함된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가 교수 근무 시간을 법정 근로시간인 주 52시간으로 줄이는 것을 강행하기로 결정하면서 의료 현장 혼란과 환자 불안이 커지고 있다.
◇ 전국 의대 교수 사직서 제출 잇따라…일부 대학은 논의 중
대전·충남권 거점 병원인 충남대는 의대 교수 78%가 사직에 동의한 것으로 26일 확인됐다.
사직서를 제출한 정확한 인원은 공개하지 않고 있다.
비대위 측은 "의대 학생이 단체로 유급을 당하거나, 전공의가 실제로 사법 조치를 당한다면 교수 자유의사에 따라 사직하겠다고 밝힌 인원"이라며 "사직서는 교수 개인이 자율 작성해 오는 29일까지 비대위에 제출하면 취합해 학교와 병원에 제출할 예정이다"고 밝혔다.
충남 순천향대천안병원에서는 전날 오후 교수협의회 측이 교수들의 사직서를 취합해 병원장에게 직접 제출했다.
또 일부 교수들은 개별적으로 병원 인사 노무팀에 사직서를 냈다.
사직서 제출 인원은 이 병원에서 근무 중인 의대 교수 233명 중 100명 안팎인 것으로 알려졌다.
부산대 의대 교수협의회 소속 교수진은 교수 550여명을 대상으로 사직서를 제출받고 있다.
교수협의회는 전날부터 자발적으로 사직서를 제출하기로 결정한 가운데 오세옥 교수협의회장이 사직서를 모아 부산대에 일괄 제출하기로 했다.
충북에선 도내 유일 상급 종합병원인 충북대병원과 충북대 의대 소속 교수 200여명 중 약 50명이 사직서를 제출한 것으로 전해졌다.
충북대 의대·병원 교수회 비상대책위는 의대 증원 확대 등 필수 의료 패키지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 교수들의 자발적 사직은 이어질 것 같다며 강경한 입장을 내비쳤다.
경북대 의대 일부 교수들도 지난 25일부터 사직서를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구체적인 숫자나 신원 등은 확인되지 않았다.
영남대 의대 교수들도 사직서 제출에 뜻을 모았지만, 구체적인 제출 시기 등은 정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계명대 의대 교수들은 전공의와 의대생에게 피해가 갈 경우 사직서를 내겠다는 뜻을 모으고, 오는 27일 사직서를 내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교수들은 개별적으로 사직서를 쓰고 이를 모아 한꺼번에 의대나 대학본부에 제출하는 것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90%가 사직 의사를 밝힌 대구가톨릭대 의대 교수들도 교수비상대책위원회 등에 사직서를 낸 것으로 파악됐다.
전남대와 조선대 의대 교수들도 전날 오후부터 사직서 제출을 시작했다.
강원의대와 강원대병원 비대위 임시총회 결과 전국의대 교수협의회 입장문·전국의대교수비대위 성명서와 같이 정부에 의한 입학 정원 배정 철회가 없는 한 이날부터 자발적으로 사직서를 제출하겠다고 밝혔다.
경남 경상국립대에서도 의대 교수 260여명 중 25명가량이 사직서를 냈다.
교수들은 오는 29일까지 개별적으로 사직서를 제출할 방침이다.
전북대 의대와 전북대병원, 원광대 의대와 원광대병원, 제주대 등에서도 사직서를 내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충남 을지대와 천안 단국대 의대 교수들은 사직서 제출을 논의 중이다.
인천지역과 경기 차의과학대학교는 아직 사직서 제출을 비롯한 집단행동 움직임은 보이지 않고 있다.
◇ "당장 수술 급한데"…불안감 내비치는 환자들
교수 집단 사직 우려가 현실이 되자 환자들은 불안함을 견디지 못했다.
뇌동맥류를 앓고 있는 김모(53·충남 논산) 씨는 "매일매일 뉴스를 보고 탄식한다"며 "당장 수술이 급한 환자들은 이제 어쩌면 좋으냐"고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전공의 집단사직 사태가 발생하기 닷새 전인 지난달 14일 대전 건양대병원에서 수술이 시급하다는 전문의 진단을 받고서도 전공의 이탈 영향으로 지금껏 수술 날짜를 정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김씨는 "정부가 지지율, 표 의식하지 말고 의료계와 적극 대화에 나섰으면 좋겠다. 나보다 더 상태가 심한 환자들도 지금 줄줄이 수술을 못 받고 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해 심장 수술을 받고 충남대 병원에서 전문의 진료를 주기적으로 받아온 80대 환자의 보호자 이모(62) 씨는 "어머니가 고령에다 수술 후 징후도 좋지 않아 전문의 진료를 게을리할 수 없는데 교수님들도 사직하면 환자들은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불안을 토로했다.
전공의에 이어 교수들까지 병원을 이탈하면서 의료 현장 혼란은 점점 커지는 모습이다.
입원 병상 가동률은 70%대에서 40%대로 떨어졌고 충북도내 유일 신생아 집중치료실과 응급실은 남은 의료진들이 잦은 당직 근무를 서가며 운영하고 있다.
충북대병원 정형외과 의사는 "무릎 수술을 담당하고 있는데 전공의가 없어 이번 달에 수술을 한 건도 못 했다"며 "앞으로 해야 할 환자 수술도 두 달 치나 미뤘고 신규 외래 환자도 받지 않은 지 이미 오래"라고 상황을 전했다.
◇ 누적되는 의료진 피로…'주 52시간' 근무 논의 이어져
강원대병원은 누적된 피로뿐만 아니라 환자 안전을 위해 의료진 주 52시간 근무, 중증 환자·응급환자 진료를 위한 외래진료 축소를 내달 1일부터 시작한다.
아주대 의대 교수협의회 비대위도 최근 내부 공지 등을 통해 소속 교수들에게 법정 근로시간인 주 52시간에 맞춰 근무할 것을 권고한 것으로 파악됐다.
비대위는 당직을 선 다음 날에는 근무하지 않거나, 외래 진료를 줄이는 등 교수들의 근무 시간을 조정하기 위한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다만 진료과별로 상황이 다른 만큼 모든 교수가 주 52시간에 맞춰 근무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라고 비대위는 설명했다.
비대위 관계자는 "의대 교수들의 피로도가 지속해서 누적되고 있는 상황에서 의료 사고 등이 발생할 수 있다고 판단해 이같이 권고했다"며 "앞으로 교수들의 근무 시간을 어떻게 조정하면 좋을지에 대해 비대위 차원에서 계속해서 고민할 것"이라고 했다.
충북대병원은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교수 등 전문의들이 일주일에 1∼2번씩 당직에 투입되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변화가 없다면 교수들의 피로도가 누적돼 정상적인 진료가 안 되기 때문에 주 52시간 근무는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울산의 경우 외래진료·수술·입원진료 근무 시간을 주 52시간으로 줄이기로 했지만, 병원 현장에서는 아직 이를 체감하기 어려운 분위기다.
울산대병원 관계자는 "보도를 통해 근로시간 단축을 접했지만, 실제 단축이 체감되는 건 아직 없다"며 "전공의 파업으로 인해 잦아진 당직까지 포함해 근무시간을 줄이겠다는 의미라면 향후 차질을 빚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원광대병원도 교수들의 근무 방식에 별다른 변화는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원광대병원 관계자는 "교수들이 52시간으로 근무를 줄이기로 했다는 보도는 봤지만, 병원에 알려온 것은 없어 아직 환자들에게 이같은 상황을 전달하진 않았다. 교수들이 진료를 보는 시간이나 방식은 크게 변동이 없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