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산책] 고대 그리스 「비극」의 출현과 니체(Nietzsc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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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산책] 고대 그리스 「비극」의 출현과 니체(Nietzsche)
  • 김춘섭 위원
  • 승인 2014.07.23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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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춘 섭 전님대 명예교수
그리스 문화의 창의성은 오랜 시간의 진화로 얻어진 결과였다. 그리스의 미케네(Mycenae) 문명은 크레타 섬에서 형성된 미노스(Minos) 문명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이었으나 이른바 ‘암흑기’ (BC 1200~800)에 소실되고 말았다. 고대 그리스 문화의 창의적인 전개는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비롯한 여러 도시국가의 출현을 맞은 기원전 800년 이후의 일이다.

그리스 문학 최초의 형식은 서사시였다. 호메로스(Homeros) 작으로 알려져 있는 「일리아스(Ilias)」와 「오디세이아(Odysseia)」는 문학사상 가장 오래된 서사시의 전범이다. 그러나 그리스 문학의 백미는 역시 연극, 특히 ‘비극’에서 최고의 업적을 냈다. ‘비극’은 당초 종교적 행사에서 출발했다. ‘재생’의 신이며 포도주의 신인 ‘디오니소스’(Dionysos) 숭배를 위해 봉헌했던 제전(祭典) 의식에서 시작되었다. 물론 도시국가 아테네에서의 일이다. 반인반수(半人半獸)의 ‘사티로스’(Satyros)로 분장하고 등장한 남성 합창단(Colos)은 제단 주위에서 노래하고 춤을 추었으며, 디오니소스 신의 활동과 관련된 주신(酒神) 찬가(dithyrambos)로 연극 공연의 막을 연다. 이 연극에 붙여진 ‘비극’이라는 명칭은 극의 스토리가 비극적인데다가 숲의 신이며 디오니소스의 시종인 사티로스가 염소로 분장했기 때문에 ‘염소’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트라고스’(Tragos)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극을 뜻하는 영어 ‘tragedy'도 당연히 이 염소의 트라고스에 어원을 둔 것으로 해석한다.

19세기 후반기를 살았던 철학자 니체(1844~1900)는 초기 저작인 「비극의 탄생」(1872)에서 기원전 5세기의 고대 그리스에서 탄생한 이 ‘비극’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아냈다. ‘아이스킬로스’와 ‘소포클레스’, 그리고 ‘에우리피데스’ 등 당시의 3대 비극작가 작품에 대한 문헌학적 가치를 검토하고 이들 비극작품을 통해 고대 그리스 신화에 기반을 둔 철학적이고 문학적인 개념, 혹은 철학적 이분법을 명료하게 설명해내고 있다. 그 철학적 이분법이란 이른바 ‘아폴로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상보적 양면성 문제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아폴론’(Apollon)과 ‘디오니소스’는 제우스의 아들이다. 주지하다시피 아폴론은 태양과 빛과 음악의 신이고, 디오니소스는 술과 황홀과 열정적 감성의 신이다. 근대문학에서는 흔히 아폴론과 디오니소스, 두 개념의 대립을 통하여 빛 대 어둠, 개인주의 대 전체주의, 문명 대 자연의 원리를 상징화하는 데에 사용하기도 했다. 니체는 이 개념을 철학적 개념으로 발전시켰다. 「비극의 탄생」에서 그리스 비극을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예술적 충동’ 혹은 그 결합이라고 개념화한 것이 그것이다. 이 예술적 충동은 고대 그리스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진정으로 성취된 적이 없으며, 무엇보다도 아이스킬로스와 소포클레스의 작품이야말로 예술 창작의 극치로서 ‘비극’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비극은 세 번째 작가 에우리피데스로부터 몰락하기 시작했다고 강조했다. 에우리피데스가 소크라테스의 윤리와 지성을 비극에 주입함으로써 예술로서의 비극의 진정성을 소멸시켰다는 것이다. 즉, 에우리피데스에 와서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예술적 균형이 깨져버렸다는 것이다. 근대도 그와 같은 ‘지성주의’ 시대이며, 디오니소스적 정신과 비극이 재생되지 않고 있다고 본 니체는 당시 오페라 음악 작곡의 최고봉 ‘바그너’(Wagner)의 악극에서 그 재생을 발견하고, 실제로 한동안 그에게 강하게 경도되어 있었으나 얼마 가지 않아 사실상 이러한 신념을 철회한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혁명의 시대’ 후반기, 1844년에 출생한 니체의 생애 기간은 민족주의 의식이 가장 고양되었던 시대였다. 1848년의 2월혁명으로 탄생한 짧은 기간(1848~1852)의 공화정을 거쳐 다시 제정으로 복귀한 프랑스의 민족주의는 곧바로 소공국들로 나뉘어 있던 게르만 민족 독일의 민족주의를 새삼 불러 일으켜 세우는 자극제가 된 것이다. 당시 게르만 민족운동의 리더로 자처하고 있던 프로이센 왕국의 통일 의지는 1861년 재상으로 보임된 ‘비스마르크’에 의해 드러나기 시작했다. 임명되자마자 그는 의회연설을 통해 당시 민족주의 의식을 위축시키는 자유주의적 여론을 통박했다. 강력한 민족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민족통일의 기치를 드러낸 비스마르크가 펼친 통일노력의 하이라이트는 프랑스와 벌인 ‘통일전쟁’이었다.

1870~71의 프로이센 중심의 게르만 공국들이 프랑스와 벌인 전쟁이 그것인데, 1871년, 통일 ‘도이치란트’의 새로운 출발은 승전의 전리품과 같은 것이었다.

니체는 이 전쟁에 자원입대할 정도로 적극적인 민족주의였다. 당시 민족주의의 화신이었던 바그너를 추켜세운 것은 당연한 경과인데 그가 고대 그리스 문화의 텍스트인 ‘비극’에 심취해 있던 「비극의 탄생」즈음의 초기를 지나 통일 독일 이후「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 실린 여러 글을 저술할 때에 이르면서 민족주의의 신념에 회의를 가졌던 듯, 당시 대부분 지식인들이 품었을 자유주의의 시류에 동승한 흔적들은 음미해볼 만한 일이다. 종교적 침잠의 세계로 들어간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를 출간한 후 정신병에 시달리다가 1900년 56세로 빨리 마감한 그의 말년 생애가 우리에게 커다란 짐으로 다가오는 것은 니체, 그의 분방했던 철학적 사유가 쉽게 독해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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