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와 메르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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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와 메르켈
  • 신현호 편집인대표
  • 승인 2013.09.27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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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현호 편집국장
“여자가 총리가 되는 건 막아야 합니다.” 2005년 9월 독일 총선 직전, 앙겔라 메르켈 당시 기민당 대표를 ‘음해’하는 전화가 빗발쳤다. 현직 총리 슈뢰더는 말할 것도 없었고 기민당 출신 주지사와 장관들까지 난리였다. 게다가 선거 한 달 전 여론조사에서 메르켈은 29%로 슈뢰더(43%)에게 한참 뒤지고 있었다.
앙겔라 메르켈이 정계에 데뷔했을 때 언론은 "유머 감각도 없는 촌스러운 동독 아줌마"라고 혹평했다. 싹둑 자른 단발, 촌티 나는 '옷발'에 웃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은 이미지 변신에 성공한 세계 여성 정치인 중에 첫손 꼽힌다.

메르켈은 푸근하고 검소한 독일 주부 이미지도 지니고 있다. 훔볼트대학 교수인 남편 요하임 자우어는 이론화학 분야의 저명한 학자다. 세계 영향력 1위 여성의 남편이지만 아내의 곁을 너무 따라다니지 않는대서 오히려 구설에 오른다. 대학 동창인 두 사람은 각각 이혼하고 재혼했다. 메르켈은 전 남편의 성(姓)이다.

메르켈은 대처와 자주 비교된다. 대처는 식료품 가게 주인의 딸이고 메르켈은 시골 목사의 딸. 둘 다 소신을 꺾지 않은 강인함으로 '유리천장'을 뚫고 남성들의 정글인 정치의 영역에서 최고봉에 올랐다. 하지만 대처가 '영국병'을 고치는 과정에서 노조를 탄압하고 포클랜드 전쟁도 불사하는 등 '마초적 리더십'을 선보였다면 메르켈은 화해와 조정의 '엄마(Mutti) 리더십'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메르켈에게도 약점은 있다. 구 동독 출신인 그는 젊은 시절 공산당 조직에서 활동했음이 뒤늦게 밝혀졌던 것. 그래도 국민의 신뢰는 높다. 보수우파 정당의 지도자이지만 원전의 점진적 폐기, 최저임금제, 빈곤층 연금 확대 등 좌파의 정책도 과감히 수용했다. 독일 언론은 메르켈리즘을 '권력을 과시하지는 않지만 힘을 가진 정책'이라 요약한다.

목숨 건 투쟁을 남자들이 더 잘할 거라는 믿음은 미신이다. 역사 속 여제들이 얼마나 냉혹했는지를 전하는 사례는 무수하다. 중국 측천무후가 그랬고 이집트 클레오파트라가 그랬다. 대처는 현대 정치사에서 가장 막강한 힘을 가졌던 여성 정치인이다. 그는 원칙주의자였고 단호했으며 강경보수 노선을 견지했다. 온화함보다는 냉혹함의 비중이 훨씬 높았다. 강성노조가 판치고 남녀 편견이 심한 시대적 요인이 그렇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독일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3선에 성공했다. 4년 임기를 더하면 대처의 유럽 최장수 여성지도자 기록을 넘어선다. 메르켈이 집권한 2005년만 해도 독일은 10%가 넘는 고실업률, 재정 악화, 빠른 고령화 등으로 ‘유럽의 병자’로 취급받았다. 독일은 이제 유럽의 좌장이 됐다. 앙숙인 프랑스와 영국이 헤매는 동안 메르켈은 독일을 마법의 나라로 만들어 놓았다. 언론이 그를 ‘유럽의 여제’라고 치켜세울 만하다.

타임지는 이렇게 평했다. “메르켈은 카리스마 없이도 얼마든지 훌륭한 리더가 될 수 있는 지도자 중 한 명이다.” 그 리더십의 요체는 소통, 통합이다. 메르켈은 정치적 대부 헬무트 콜이 비자금 파문에 휩싸이자 매몰차게 결별했다. 단호함의 발휘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메르켈은 화합과 포용력을 갖춘 ‘엄마 리더십’이다. 그는 상대의 말을 따뜻하게 들어주면서 모성적인 소통으로 설득하는 데 탁월하다. 유로존 위기 때 모든 상황을 듣고 조율하며 최대공약수를 만들어 낸 것도 이 덕분이라고 한다. 주말 별장에서 키운 채소로 친구들을 대접하며 농담까지 즐기는 소탈한 면모도 인기 비결이다.

박 대통령에게 원칙은 좋은 정치적 자산이었다. 가벼운 말들이 떠도는 정치판에서 누구도 그가 던진 말의 무게를 감당하기 쉽지 않았다. 그러나 정부 밖에서 남에게 원칙을 따지는 것과 정부 안에서 원칙을 실천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국가를 책임지면서 실수와 잘못 없이, 야당의 반대와 공세 없이 일하기는 어렵다. 자신의 말과 행동에 대해, 자신의 정부와 정책에 대해 설득하고 해명하고 사과도 해야 한다. 그것을 국정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게 국가를 책임진 자의 운명이다. 그런데 어느새 그의 원칙에서 느껴지던 비수와 같은 날카로운 힘은 투박한 우악스러움으로 바뀌었다. 그는 최근 현안들에 대해 친절하고 설득력 있는 설명을 거의 하지 않았다. 대신 감정 섞인 주장과 핑계뿐이었다. 권력은 수다스러울 필요없다는 오만함의 표시인가?

박근혜 대통령이 어제 국무회의에서 기초연금 공약 후퇴에 대해 “어르신들 모두에게 지급하지 못한 결과가 발생해 죄송한 마음”이라고 밝혔다. ‘65세 이상 노인 모두에게 기초연금 20만원 지급’ 공약을 파기한 데 따른 입장 표명이다. 사과의 틀을 취했지만, 사과의 대상이 국민인지 기초연금을 못 받는 30% ‘어르신’인지조차 불분명할뿐더러 공약 파기에 대해 구차한 변명을 덧붙여 실망스럽다. 박 대통령은 글로벌 경제상황과 재원 마련이 어렵다는 이유를 들었다. 경제상황과 재정 문제는 지난해 대선 때와 지금이 크게 달라진 게 없다. 경제와 재정을 고려하지 못하고 공약을 했다면 무능한 것이고, 재정상황을 예상하고도 공약을 내놨다면 ‘대국민 사기극’을 벌인 것이다.

여느 대통령보다 더 잘해낼 수 있는 조건과 자원을 갖고 있는 박 대통령이 겨우 이 정도라는 건 믿기 어렵다. 여기서 멈추거나 포기하지 않기를 바란다. 아직도 사람들은 기대하고 있다. 박 대통령이 좋아하고 친분도 있는 독일의 메르켈 총리는 야당의 의제를 수용하는 방법으로 야당을 무력화했다. 인내, 공감, 소통으로 광범위한 지지를 얻어 3선에 성공했다. 그는 유로존 위기 때 독일의 대응속도에 대해 불만이 나오자 “위기를 한 방에 날려버릴 바주카포는 없다”면서 “모든 것은 남을 설득하는 힘에 달렸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메르켈이 되어서는 안되는가? 아니 될 수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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