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자들 "광주 상황 보고받고 자위권 주장 등 간접 책임 충분"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고(故) 노태우 전 대통령의 책임을 두고 평가가 갈리고 있다.
노씨는 '12·12 및 5·18 사건' 수사와 재판으로 징역 17년의 확정판결을 받았지만, 일각에선 "5·18과 관련해 처벌받은 것은 아니다"고 주장한다.
노씨의 최측근으로 '6공화국 황태자'로 불렸던 박철언 전 의원은 27일 노씨의 빈소를 찾아 "노 전 대통령은 광주 문제와 연관이 없다"며 "5·18과 관련해 기소도 되지 않았고 재판도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러한 주장이 사실인지 당시 검찰 수사 결과와 법원 판결문 등을 살펴봤다.
실제 검찰은 전두환 전 대통령과 달리 노씨에게는 5·18 민주화운동을 과잉 진압하고 시민을 사살한 혐의(내란목적살인)를 적용하지 않고 재판에 넘겼다.
당시 검찰의 5·18 특별수사본부장은 "노씨의 경우 수경사령관(수도경비사령관)으로 재직하고 있어 수도 치안에 급급했기 때문에 광주 진압 과정에서의 책임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검찰의 이러한 판단을 토대로 진행된 재판에서도 5·18에 대한 노씨의 책임은 거론되지 않았다.
결국 노씨는 12·12쿠데타 전후로 이뤄진 반란과 내란에 가담한 행위에 대해서만 유죄로 인정됐다.
과연 5·18에 대한 형사 처벌을 면한 것으로 노씨의 책임은 없는 것일까.
5·18 연구자들은 '12·12 및 5·18 사건' 수사와 재판은 그것 자체로 한계를 지니고 있어, 기소와 판결만 두고 5·18 책임이 없다고 결론 지을 수 없다고 평가한다.
특히 유혈 진압의 책임을 묻는 '내란목적 살인죄'의 경우 10일간의 항쟁 기간 중 마지막 날인 5월 27일 재진압작전에 대해서만 유죄로 인정됐다.
그 이전에 벌어진 잔혹한 진압과 발포 행위, 민간인 학살 등은 "폭도들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한 자위권 차원이었다"는 신군부 측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그대로 한계를 노출했다.
시간이 흘러 계엄군이 조준경을 사용한 조준 사격을 하거나 헬기사격을 하는 등 '자위권 주장'은 허구라는 사실이 속속 드러나고 있지만 이에 대한 법적 판단은 다시 이뤄지지 않은 상태다.
폭동 진압을 위한 신군부의 '충정작전'에서 잔혹한 5·18 진압이 비롯된 부분 역시 노씨의 책임을 방증하는 부분이다.
충정 작전을 위한 훈련과 충정부대를 총괄한 것이 당시 수경사령관이었던 노씨였다.
이 때문에 수경사에서 충정회의가 열리곤 했는데 첫 회의 때부터 "군의 투입을 요하는 사태 발생 시 강경한 응징조치가 요망"된다는 기조가 세워졌다.
노씨가 이러한 기조로 키워 낸 충정부대 중 가장 잘 훈련된 3공수, 7공수, 11공수 특전단이 광주로 투입됐다.
아울러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조치에 앞서 노씨는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에 참석해 군의 개입을 주장하기도 했다.
당시 회의록에 따르면 노씨는 "정부의 힘이 부족하면 군이 도와드려야 한다"거나 "난국을 수습하는데 군이 이바지할 것을 건의한다"고 발언했고 이후 다른 지휘관들의 동의 발언이 이어졌다.
결국 다음날인 5월 18일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됨과 동시에 군이 투입되면서 5·18의 비극이 시작됐다.
5월 19일부턴 군 수뇌부들이 격일제로 모여 광주 상황에 대해 보고를 받고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에도 노씨는 항상 함께였다.
특히 5월 21일 노씨는 시민을 향한 총격과 사살에 정당성을 부여하게 되는 '자위권'과 관련한 회의에서 전두환과 함께 자위권 발동을 강조하기도 했다.
노씨는 정권을 잡고 나서도 5·18 왜곡·조작에 관여했다.
폭동으로 왜곡돼 있던 5·18의 진실이 세상으로 처음 드러나게 된 1988년 국회 광주청문회를 앞둔 노태우 정권은 왜곡과 조작 등을 주도한 '5·11연구위원회'를 만들기도 했다.
당시 광범위한 조작과 은폐, 왜곡으로 41년이 지난 지금까지 5·18의 진실을 찾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
노씨가 유언으로 "5·18 희생자에 대한 가슴 아픈 부분, 그 이후의 재임 시절 일어났던 여러 일에 대해서 본인의 책임과 과오가 있었다면 너그럽게 용서해주시기를 바란다"고 한 것도 노씨 스스로 5·18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는 발언으로 해석된다.
이와 관련 노씨를 핵심 조사 대상으로 삼았던 5·18 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노씨도 5·18 관련 중요한 책임자로 조사하려 했지만, 그의 별세로 직접 조사가 불가능해졌다"며 "그러나 서사적 진실, 실체적 진실을 밝혀야 하는 만큼 관련 조사는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